학술계간지 ‘한국학보’ 30년만에 막내리다

  • 입력 2005년 10월 6일 03시 04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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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일 ‘한국학보’의 종간호를 발간한 일지사의 김유진 편집장이 종간호(120호·왼쪽)와 1975년 창간호를 살펴보며 아쉬운 마음을 달래고 있다. 권주훈 기자
5일 ‘한국학보’의 종간호를 발간한 일지사의 김유진 편집장이 종간호(120호·왼쪽)와 1975년 창간호를 살펴보며 아쉬운 마음을 달래고 있다. 권주훈 기자
“‘한국학보’의 이념은 이른바 ‘식민사관 극복’이었고 이를 관철하게 한 사람은 일지사 전 대표 김성재 씨였습니다. 만일 식민사관이 초극되었다면 한국학보가 더 이상 존속하지 않아도 되지 않겠습니까. 30년간 지켜보아 주신 집필자들, 독자들 제현께 머리 숙여 감사드립니다.”(한국학보 종간사 중에서)

한국학 연구 발전에 지대한 공헌을 해 온 학술계간지 ‘한국학보(韓國學報)’가 5일 120호(2005년 가을호), 종간호를 발간했다. 1975년 창간된 지 30년 만이다. 끝내 재정난을 극복하지 못하고 한국학 연구의 30년 여정을 마무리하게 된 것이다.

어려운 여건에서도 한국학보 발간에 헌신해 온 김 대표가 타계(올해 6월)한 지 4개월 만의 종간이어서 주변을 더욱 안타깝게 하고 있다. 창간호부터 편집위원을 맡아 온 한영우(한국사) 한림대 특임교수는 “한국학보와 김 대표의 운명이 같이 가게 됐다”고 아쉬워했다.

가을호는 매년 9월 초순에 나왔으나 이번엔 한 달이나 늦어졌다. 일지사 김유진 편집장의 설명이 가슴을 아프게 한다.

“한국학보를 너무 빨리 떠나보내는 것 아닌가 하는 아쉬움이 가슴 한쪽에 자리 잡고 있었나 봅니다. 그래서 저도 모르게 편집 작업을 천천히 진행한 것 같습니다.”

한국학보는 창간 이래 국문학 국사학 미술사학 고고학 인류학 민속학 등 국내 한국학 연구의 거점이었다. 그러나 30년 역사는 험난한 여정의 연속이었다. 재정난 때문이었다. 한 출판사가 상업성이 떨어지는 학술지를 낸다는 것은 처음부터 보통 일이 아니었다. 가장 큰 위기는 1998년에 찾아왔다. 여기저기 자금 지원을 호소했지만 별다른 효과가 없었다. 결국 1998년 여름호인 91호를 제때에 내지 못하고 가을에 91·92호 합병호를 내야 했다.

창간사를 쓴 데 이어 이번에 종간사까지 쓴 편집위원 김윤식(국문학) 명지대 석좌교수의 소회.

“학문은 예술 작품과 달라서 누군가가 나타나 기존의 성과를 능가하게 되어 있습니다. 이것을 전제로 할 때 학문이 성립되는 것입니다. 한국학보 종간은 아쉬운 일이지만 이제 그 소임을 다했다고 생각합니다.”

김 교수는 30년 동안 고 김 대표와 함께 등산하고 절을 찾아다닌 사이. 이들은 북한산만 찾았다. 그것도 종로구 구기동 코스만 고집했다. 김 편집장은 “김 교수님은 이를 놓고 ‘두 바보의 길’이라고 말씀하신 적이 있다”면서 “그분들의 우직한 고집이 있었기에 한국학보 30년이 가능했다”고 말했다.

이번 종간호에는 편집위원인 신용하(한국독립운동사) 한양대 석좌교수와 박용운(한국사) 고려대 교수, 전경수(인류학) 서울대 교수, 정옥자(한국사) 서울대 교수 등 6명의 논문이 수록됐다.

정확하게 만 30년, 120호 만에 막을 내리게 된 ‘한국학보’. 그러나 한국학 연구 역사에 그 이름은 길이 남을 것이다.

이광표 기자 kplee@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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