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사회]‘대중독재의 영웅 만들기’

  • 입력 2005년 9월 3일 03시 04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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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중독재의 영웅 만들기/비교역사문화연구소 기획·권형진 이종훈 엮음/532쪽·2만 원·휴머니스트

1960∼70년대 반공 교육의 상징이었던 ‘이승복 어린이’.

어떻게 해서 강원도 산골의 열 살 난 어린이는 무장 공비의 총칼 앞에서도 “나는 공산당이 싫어요”라고 말할 수 있었을까.

학교에서, 또 어른들에게서 공산당의 잔악상을 귀에 못이 박이도록 들어온 어린아이는 단지, 무심코 한마디 내뱉은 것은 아니었을까. 그런 그가 어떻게 ‘반공의 순교자’로 탈바꿈했을까.

‘반공 영웅’ 이승복 어린이의 동상. 철거된 그의 동상은 20세기 독재체제가 만들어 냈던 숱한 대중영웅 신화들의 명멸을 상징하는 듯하다. 사진 제공 휴머니스트

필자는 바로 여기에 ‘이승복 진실 게임’의 역사적 의미가 담겨 있다고 말한다.

“공산주의가 무엇이고 공산당이 어떤 것인지 이해할 수도 없었을 어린아이들에게 생명보다 이념(반공)이 더 중요하다고 가르쳤다는 사실! 반공 교육의 그 맹목성이야말로 분단시대의 폭력성을 역설적으로 드러내는 게 아닌가.”

20세기는 대중 영웅을 양산했다.

근대사회는 대중을 길들이기 위해 대중에 좀 더 친숙한 영웅, 대중 자신들의 삶을 살아가는 새로운 영웅을 ‘발명’할 필요가 있었다. 독재자는 이들 대중 영웅을 일상 속에 심어 놓았다. 이승복이 그랬고, 중대원을 구하기 위해 수류탄에 몸을 던진 강재구 소령이 그랬고, 주먹으로 터진 둑을 막았다는 어느 네덜란드 소년이 그랬다.

그 시초는 나치의 대중 영웅 호르스트 베셀이었다.

나치의 선전상 괴벨스는 돌격대원이었던 베셀이 좌익의 습격을 받아 사망하자 그의 죽음을 신격화하며 영웅 신화에 불을 지폈다. 그 의도는 자명했다.

“죽은 돌격대원은 그의 죽음을 통하여 한 번 더 (나치)운동을 위해 이용되어야만 한다. 빨갱이들이 그들의 테러로 얻을 수 있었던 이익보다 잃는 것이 더 크도록!”

당시 독일 사회에서 선택받은 엘리트였던 베를린대 법대생의 죽음은 조국을 구하기 위해 자신을 희생하는 대중 영웅의 재료로 안성맞춤이었던 것이다.

한양대 ‘비교역사문화연구소’가 두 차례 국제학술대회의 연구 성과를 토대로 펴낸 이 책은 대중독재 시대에 영웅 숭배가 만들어지고 전승되는 과정, 그 메커니즘을 밝히고자 한다. 국민의 정체성 형성에 이들 대중 영웅이 어떠한 영향을 미쳤는지를 철저히 규명한다.

유럽(독일 구소련 프랑스 스페인)의 1930∼40년대, 동아시아(한국 북한 중국)의 1960∼70년대 대중독재 권력이 이름 없는 작은 사람들을 어떻게 대중 영웅으로 만들어 갔는지를 면밀히 추적한다.

나치 독일의 대중 영웅 베셀, 마오쩌둥의 노동 영웅 레이펑, 김일성 체제의 천리마 영웅 길확실, 박정희 시대의 반공 영웅 이승복, 스탈린 시대의 소년 영웅 모로조프….

대중은 즐겨 영웅담을 통해 역사를 소비한다고 했던가.

“대중은 스펙터클을 기대한다. 그것은 시대를 초월하는 대중의 욕구다. 이러한 대중의 심리를 포착하여 주술을 걸고 ‘홀림’의 정치학을 실천하는 게 대중 독재의 영웅 숭배다.”

하기야 ‘대중은 하늘의 번개가 내려와 불살라 주기를 기다리고 있는 마른 장작더미와도 같다’(칼라일)고 했으니!

이기우 문화전문기자 keywoo@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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