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예술]오 자히르…그 길 위서 찾은건 나 자신

  • 입력 2005년 7월 16일 03시 08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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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봄 카자흐스탄의 고원을 찾은 파울로 코엘료. 그의 신작 ‘오 자히르’에서 프랑스에 사는 소설가인 주인공 ‘나’는 사라진 아내 에스테르를 찾아 카자흐스탄까지 간다. 사진 제공 문학동네
지난해 봄 카자흐스탄의 고원을 찾은 파울로 코엘료. 그의 신작 ‘오 자히르’에서 프랑스에 사는 소설가인 주인공 ‘나’는 사라진 아내 에스테르를 찾아 카자흐스탄까지 간다. 사진 제공 문학동네
◇오 자히르/파울로 코엘료 지음·최정수 옮김/448쪽·9800원·문학동네

《세계적인 베스트셀러 ‘연금술사’를 쓴 브라질 작가 파울로 코엘료의 새 소설 ‘오 자히르’가 우리말로 옮겨져 나왔다. 갖가지 평이 엇갈리는 이 작품의 의미를 신세대 대표 작가인 김연수 씨의 서평을 통해 알아본다.》

‘오 자히르’의 도입부에는 콘스탄티노스 카바피의 ‘이타카’라는 시가 실려 있다. 이 시에는 ‘길 위에서 너는 이미 풍요로워졌으니/이타카가 너를 풍요롭게 해 주길 기대하지 마라’라는 구절이 있다. 이 구절은 소설의 주제를 집약적으로 보여 준다. 즉 ‘오 자히르’는 21세기판 ‘오디세우스’다. 오디세우스가 페넬로페가 기다리는 이타카를 향해 먼 여행에 나서듯 이 소설의 주인공은 어느 날 갑자기 사라진 아내를 찾아 카자흐스탄까지 찾아간다. 그 여로에서 주인공이 진정한 사랑의 의미를 깨닫게 되는 건 당연하다.

여기까지 말하면 ‘오 자히르’는 현대판 우화처럼 보일지도 모른다. 코엘료에 따르면 이슬람 전통에서 비롯된 ‘자히르’는 눈에 보이며, 실제로 존재하고, 느낄 수 있는 어떤 것으로 일단 그것과 접하게 되면 서서히 우리의 사고를 점령해 나가 결국 다른 무엇에도 집중할 수 없게 만들어 버리는 사물 혹은 사람을 말한다. 이 소설에서는 ‘자히르’란 사라진 주인공의 아내일 수도 있고, 자유일 수도 있고, 사랑일 수도 있고, 혹은 우리 내면에 깃든 신성일 수도 있다. 그것이 말하는 메시지는 간단하다. “지금까지의 너이기를 그만두라. 그리고 너 자신이 돼라.”

하지만 소설가인 주인공의 말처럼 메시지는 중요하지 않다. 모든 소설은 압축되기를 거부하니까. 코엘료가 뉴에이지 소설가로 구분되는 만큼, 이 소설에도 그런 요소는 자주 등장한다. 예컨대 “오직 현재뿐이지요. 그들이 늘 행복한 이유는 바로 그것입니다”나 “세상을 바꾸고 싶다면, 전사들이 모닥불 주위에 모여 앉아 이야기를 나누던 시대로 돌아가야 해요” 같은 문장들이다. 이 문장들은 뉴에이지 관련서를 떠올리게 한다. 그런 점에서 보자면 코엘료의 다른 소설과 마찬가지로 ‘오 자히르’ 역시 문학서를 가장한 자기 계발서라고 할 수 있다.

이 소설에는 현대인에게 중요한 문제들이 줄기차게 등장한다. 코엘료는 결혼 제도의 합리성, 진정한 사랑의 의미, 금전과 행복의 상관관계 등을 거론한다. 이 문제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 사람은 없을 테니, 이번에도 독자들은 ‘오 자히르’가 묻는 질문에 빠져들 수밖에 없다. 그런데 이 질문의 대답으로 코엘료는 유목민의 생활을 거론하며 실제로 카자흐스탄의 스텝까지 찾아간다. 스텝에서는 누구나 ‘잘 짜여 있던 모든 것은 혼란에 빠지고 확고한 진실로 여겨졌던 것들은 모두 뒤흔들리는’ 경험을 하기 때문이다.

코엘료는 대단히 질문을 잘 던지는 사람이다. 그런데 이번에는 대답도 아주 잘했다. 그가 말하는 ‘유목’이라는 개념은 너무나 매력적이고도 도발적이다. 책에는 외눈박이 괴물 키클롭스를 만난 오디세우스가 어떻게 그 위기에서 빠져나오는지 인용했다. 유목이 모든 질문의 답이 되는 까닭이 거기에 있다. 우리는 아무도 아니다. 우리 자신일 뿐이다. 본문 중에는 한국 독자들을 위한 서비스도 있는데, 잘 찾아보기를.

김연수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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