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구촌 海神 잠에서 깨어나다

  • 입력 2005년 7월 15일 03시 1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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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년은 해신(海神)의 해. 지구촌의 해상 영웅들이 잠에서 깨어나고 있다. 한국에서는 드라마의 인기를 바탕으로 ‘성웅’ 이순신(李舜臣), 해상왕 장보고(張保皐)가 새롭게 부각되고 있다. 중국은 정화(鄭和)의 남해 대원정 600주년, 영국은 트라팔가르 해전 200주년, 일본은 쓰시마(對馬) 해전 100주년 등 세계 각국도 저마다 ‘과거의 영광’을 기리고 있다.》

▽각국 ‘해신’ 추모 열기=독도 망언과 역사교과서 왜곡 등 일본과의 갈등 및 충무공 탄신 460주년이 겹치면서 올해 한국에서는 이순신 열풍이 불었다. 관련 서적이 쏟아져 나오고 각종 기념행사가 잇따랐다. 얼마 전 종영된 드라마 ‘해신’의 인기로 부활한 장보고는 동북아시아의 해상무역을 주도한 ‘글로벌 최고경영자(CEO)’의 원조로 주목받고 있다.

중국은 11일 정화의 남해 대원정 600주년을 맞아 축제 분위기에 빠져들었다. 정화는 1405년부터 1433년까지 모두 7차례에 걸쳐 수백 척의 선단을 이끌고 동남아, 중동, 아프리카 등 세계 30여 개국을 탐험한 명나라 시대의 항해가. 콜럼버스보다 71년 먼저 신대륙을 발견했다는 설도 있다.

중국 국무원은 11일을 ‘항해의 날’로 정했다. 베이징(北京)의 중국국가박물관은 6일부터 선박, 유물 등을 전시하고 있으며 기념우표, 기념주화 등도 발매됐다. 싱가포르, 말레이시아 등 정화가 정박했던 국가들에서도 학술회의, 뮤지컬 공연 등이 이어지고 있다. 이달 중에는 당시의 선박을 재현한 탐사단이 출발할 계획이다.

영국에서는 지난달 28일부터 이달 3일까지 허레이쇼 넬슨 제독의 트라팔가르 해전 승리 200주년을 기리는 행사가 성대하게 열렸다. 포츠머스 항 앞바다에서 열린 국제관함식에는 세계 36개국, 167척의 군함 및 선박들이 참가했고 밤에는 수천 발의 폭죽을 발사하는 초대형 불꽃놀이가 벌어졌다. 10월 21일 200주년 기념일까지 뮤지컬, 퍼레이드, 전시회 등의 행사가 끊임없이 계속될 예정이다.


일본에서도 5월 27일 러시아 발트함대를 격파하고 러일전쟁의 승패를 결정지은 쓰시마(對馬) 해전 승전 100주년을 전후해 각종 기념행사가 열렸다. 당시의 전함 미카사(三笠) 함이 전시되어 있는 가나가와(神奈川) 현 요코스카(橫須賀) 시를 중심으로 기념비 건립, 추모행사 등이 조용히 거행됐다. 또 쓰시마 해전의 영웅인 도고 헤이하치로(東鄕平八郞) 제독의 전기도 인기를 끌고 있다. 도고 제독은 “(세계) 해군 사상 군신(軍神)은 이순신 한 사람뿐이다. 그에 비하면 나는 부사관에 불과하다”며 이순신 장군을 예찬한 인물로 우리에게도 친숙하다.

서울 종로구 세종로 사거리에 있는 충무공 이순신 장군(1545∼1598)의 동상. 임진왜란 때 불패의 신화를 기록하며 나라를 구했다.

▽승자는 영광, 패자는 씁쓸=해상 영웅을 추모하는 열기는 화려했던 옛 시절을 통해 애국심을 고취하려는 각국의 노력을 반영하고 있다. 해양력과 국력이 일치했던 시대의 해신들은 영광의 상징인 셈이다.

중국인들에게 정화는 세계화의 상징이다. 특히 침략이 아닌 무역 거래와 문화 교류를 통해 세계를 제패했다는 점에서 자부심을 갖고 있다. 한편으로는 원정 이후 엄격한 해금(海禁) 정책으로 쇠락의 길을 걸었던 과거에 대한 철저한 반성도 담겨 있다. 최근 중국 관영 차이나 데일리는 “중국의 외교정책은 정화의 정신에 자극받고 있다”고 분석했다.

영국인들에게 트라팔가르 해전은 각별하다. 200년 전 프랑스 스페인 연합함대를 격파함으로써 유럽제국을 건설하려는 나폴레옹의 야심을 막고 ‘해가 지지 않는 제국’으로 도약하는 발판을 마련했기 때문. 6일 2012년 하계 올림픽 개최지가 런던으로 발표됐을 때 영국 시민들이 운집했던 곳도 런던의 트래펄가 광장이었다.

일본의 반응은 미묘하다. 러일전쟁의 승리로 본격적인 제국주의 국가 대열에 오르는 출발점이었던 쓰시마 해전은 보수파에게는 영광의 상징이다. 민주당의 니시무라 신고(西村眞悟) 중의원 의원은 기념식 연설에서 “승전행사를 국가적 행사로 여는 영국을 보라”며 국가 차원에서 행사를 주관하지 않은 일본 정부를 질타했다. 반면 진보진영은 “그날의 승리 이후 우리는 오만해졌고 결국 1945년 패전의 비극으로 이어졌다”며 지나친 흥분을 경계하고 있다.

하지만 승자의 열광 뒤에는 패자의 아픔도 있다. 패전국인 프랑스 스페인 등은 영국인들의 요란한 축하행사를 곱게 보지 않고 있다. 러시아는 이날 전몰 장병을 추모하고 패전 원인을 분석하는 학술행사를 열었다.

한국인들에게도 쓰시마 해전은 잊을 수 없는 아픔이다.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이 곧 을사늑약을 체결하며 야욕을 드러냈기 때문. 도고 제독의 승전을 기념하기 위해 일제가 경남 거제시에 세운 ‘취도(吹島) 기념탑’ 철거 문제를 놓고 최근 주민들과 시민단체 사이에 논란을 빚기도 하는 등 여전히 아픔은 현재 진행형이다.

김재영 기자 redfoot@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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