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달의 독립운동가-호국인물’ 후손들이 말하는 ‘조국’

  • 입력 2005년 6월 6일 03시 03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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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달의 독립운동가로 선정된 김동삼 선생의 손자인 김중생 씨가 중국 만주에서 살다가 1989년 영구 귀국했을 때 얘기를 담은 본보 기사를 가리키며 할아버지를 떠올리고 있다. 원대연 기자
이달의 독립운동가로 선정된 김동삼 선생의 손자인 김중생 씨가 중국 만주에서 살다가 1989년 영구 귀국했을 때 얘기를 담은 본보 기사를 가리키며 할아버지를 떠올리고 있다. 원대연 기자
《‘호국의 달(6월)’이 아니면 누가 개인의 안위를 팽개친 채 만주 벌판을 돌아다니던 독립운동가를 기억할까. 현충일(6일)이 아니면 누가 전장에서 쓰러져 간 용사들을 떠올릴까. 현충일을 맞아 독립운동가와 전쟁 영웅의 후손이 ‘조국’의 의미에 대해 가슴에 담아뒀던 얘기들을 털어놨다.》

▼독립군 양성 김동삼선생 손자 중생씨▼

“뭐하다가 이제야 왔소?”

김중생(金中生·72) 씨는 서울 강서구 방화동 자택을 찾은 기자에게 벌컥 화부터 냈다. 그는 국가보훈처와 광복회가 선정한 ‘6월의 독립운동가’ 일송 김동삼(一松 金東三) 선생의 친손자.

김동삼 선생은 1911년 만주로 건너가 이시영(李始榮), 이동녕(李東寧) 등과 함께 신흥무관학교의 전신인 신흥강습소를 세워 독립군 양성에 힘쓰고 항일 무장투쟁을 준비하다 체포돼 서대문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르던 중 1937년 4월 순국했다.

김 씨는 “일제 치하에서 당시 독립운동가와 그 가족이 겪었던 설움, 고통을 다른 사람들은 잘 모를 테지만 요즘도 그런 얘기 하기가 쉽지 않은 것 같다”며 옛날 생각에 눈시울을 붉혔다.

중국 북만주지방의 반일운동 근거지로 유명한 작은 마을, ‘쥐위안창(聚源昶)’이 그의 고향. 1945년 광복이 되고나서도 김 씨의 아버지는 민족주의자의 아들이라는 이유로 중국 공산당으로부터 모진 고문을 당했고 1950년 그 후유증으로 돌아가셨다.

그 후에도 만주에서 농사를 지으며 어렵게 지내던 김 씨는 1989년 의성 김씨 종친회의 도움으로 어머니 이해동(李海東·2003년 작고) 여사, 부인 이순옥(李順玉·66) 씨 등과 함께 독립운동가의 후손으로는 처음으로 영구 귀국했다.

그 후 독립운동가 후손 수백 명이 귀국했지만 지금까지 서로 연락처를 아는 경우는 드물다. 서로 궁금해 하는 사람은 많지만 보훈처가 소재지를 알려주지 않기 때문.

그는 “만주 독립운동가의 후손끼리 모이면 무슨 대단한 보상이라도 해 달랄까봐 겁나는 모양”이라며 “그나마 운동가들의 행적이나 정황을 제대로 알고 있는 사람이 이제 몇이나 살아 있겠나. 우린 그 역사나 제대로 전달해주고 가고 싶은 것”이라고 말했다.

2001년까지 그가 수소문해 직접 만든 명부에는 40여 명의 귀국 유공자 후손의 이름이 적혀 있다. 이미 그중 두세 명은 세상을 떠났다.

김 씨는 ‘일송 김동삼 관련 문장집’(2003년) 등 4권의 책을 냈다. 기억이 더 희미해지기 전에 독립운동 관련 뒷얘기와 사료가 될 만한 자료를 모아두기 위해서다.

그는 “요즘 사람들은 나이가 많고 적음을 떠나, ‘나라’를 잃는다는 것의 슬픔과 비극을 잘 모르는 것 같다”며 “그러니까 군대 안 보내려고 부모가 나서서 국적을 버리게 하는 것 아니겠느냐”며 개탄했다.

김 씨의 큰 조카는 현재 군복무 중이다. 중국에서 2년간 병역을 마치고 귀화한 작은 조카도 다시 한국에서 군 복무를 하기로 했다.

김재영 기자 jaykim@donga.com

▼6·25순국 김문성중위 조카 익창씨▼

이달의 호국인물로 선정된 김문성 중위의 조카 김익창 씨가 5일 서울 동작동 국립묘지의 묘비 앞에 무릎 꿇고 앉아 생각에 잠겨 있다. 원대연 기자
“와, (증조)할아버지다.”

5일 서울 동작구 동작동 국립묘지를 찾은 김익창(金益昌·60) 씨의 손자 손녀들은 한 묘비 앞에 다다르자 펄쩍펄쩍 뛰었다.

묘비에는 ‘해병대 중위 김문성(金文性)’이라고 적혀 있다. 그는 6·25전쟁이 한창이던 1951년 당시 강원 양구지역에서 치열하게 벌어졌던 ‘도솔산 전투’를 승리로 이끈 주인공. 전쟁기념관이 선정한 ‘6월의 호국인물’이다.

김 중위의 막내조카인 김 씨는 “작은아버지가 젊었을 때 돌아가시는 바람에 직계 후손이 없어 조카들이 모시고 있다”며 해마다 이맘때면 아들 내외와 손자 손녀를 데리고 이곳을 찾는 이유를 설명했다.

“이렇게 많은 묘지 중에 사연이 없는 이가 어디 있겠느냐”고 말하던 김 씨는 뛰어노는 손자 손녀를 보다가 “내가 저만할 때 작은아버지 소식을 접했다”며 얘기를 시작했다.

김 중위는 부유한 집안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출중한 외모와 쾌활한 성격에 ‘신랑감 1호’로 부러움을 샀다. 그러던 그의 자원 입대는 가족에겐 상당한 충격이었지만 누구도 말리지 않았다. 김 씨는 “당시 군 입대는 호국청년의 신성한 의무였다”고 회상했다.

사병으로 입대한 김 중위는 군 생활이 적성에 맞았던지 다시 해군사관학교에 지원했다. 그리고 해병대 소위 임관 3개월 만에 전장에서 목숨을 잃었다. 그의 나이 21세 때였다.

김 씨는 “내가 그 어린 나이에 나라가 무엇인지, 애국이 무엇인지 알기나 했겠느냐”며 “그래도 자식을 잃고 슬퍼하는 할아버지 할머니의 상심한 표정을 지켜보며 무언가 느낀 게 있었는지 지금껏 외국제품 하나 안 쓴다”고 말했다.

그는 “우리 가족 중 나라와 민족을 위해 봉사하고 희생한 훌륭한 분이 계셨다는 얘기를 후손에게 해 줄 수 있는 자료는 신문기사 스크랩이 전부”라고 아쉬워했다.

문병기 기자 weappo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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