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예술]‘어느 날, 크로마뇽인으로부터’

  • 입력 2005년 5월 6일 16시 58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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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 크로마뇽인으로부터/이평재 지음/248쪽·1만 원·민음사‘욕망은 충족되는 게 아니라 더 큰 욕망을 향해 끊임없이 상승하는 것’이라는 정신분석학자 자크 라캉의 ‘욕망이론’처럼 인간은 본질적으로 더 큰 욕망을 위해 살아가는 존재다.

문제는 환경 때문에 욕망이 심하게 뒤틀리고 왜곡될 수 있다는 것이다. 불륜 때문에 배우자를, 돈 때문에 부모를 살해하는 모습은 도덕불감증이나 물질주의의 만연에서 비롯된 현대인의 일그러진 욕망에 다름 아니다.

이 소설집의 표제작 ‘어느 날, 크로마뇽인으로부터’는 외도한 아내에게 버림받고 그 상처의 아픔을 일그러진 성적 욕망으로 표출하는 주인공 ‘나’에 관한 이야기다.

3만5000년 된 크로마뇽인 유령과 만난 뒤 성기가 작아지는 증세에 시달리는 형사인 ‘나’. 인질범 설득이 전문인 ‘나’는 차갑고 비정하다. 여자를 비하하며 ‘사랑은 없다’는 믿음을 갖고 산다. 수많은 여자와 섹스를 하지만 마음 깊은 곳에서는 그 여자들을 경멸한다. 그 이유는 아내로부터 버림받은 기억 때문이다.

소설 ‘어느 날, 크로마뇽인으로부터’의 작가 이평재(46) 씨가 직접 그린 삽화. 저자는 일그러진 욕망이 몸의 일부로 바뀌어 결국 자신을 잡아먹는 모습을 형상화했다. 사진 제공 민음사

그 기억 때문에 ‘나’는 여성을 성적 쾌락의 대상으로 여기며 욕망을 정당화한다. 그는 우연히 크로마뇽인 유령과 만난 뒤 성기가 점점 작아지는데도 욕망을 주체하지 못한다.

이 소설은 유령이 나오고 현실과 환상의 경계를 오가기도 하지만 판타지 소설과는 거리가 멀다. 작품에 나오는 성(性)도 아름답거나 황홀한 게 아니라 대부분 가학적이거나 잔인하다. 주인공의 욕망은 고통으로 일그러진 피해의식의 표현이며 그 끝은 파멸이다.

하지만 저자의 의도는 파멸에서 그치지 않는다. 읽는 이들이 ‘나’의 파멸에 이르는 과정을 따라가 보면 교훈적이라는 느낌을 갖게 된다. 크로마뇽인 유령이 단순히 주인공을 파멸로 이끄는 존재가 아니라 ‘나’를 각성시키고 인간성을 회복시키는 존재로 부각되기 때문이다.

크로마뇽인 유령은 성기가 사라진 구멍으로 주인공이 빨려 들어가는 모습을 보며 ‘너에게서 네가 다시 태어날 수 있을까’라고 묻는다. 저자는 이를 “주인공이 자신의 몸에 있는 구멍으로 사라져 버리는 것은 모든 것을 무화(無化)시키고 다시 시작하려는 일종의 희망”이라고 설명했다.

이 밖에 남편에게 사랑을 느끼는 시어머니를 살해한 아내 이야기를 다룬 ‘고양이의 변주곡’, 위인(偉人)이 죽을 때 나타난다는 새를 보기 위해 TV만 보다 죽어버리는 사람을 그린 ‘리아논의 새’ 등 수록된 작품들은 과감한 상상력을 바탕으로 인간의 욕망과 삶의 의미를 묻고 있다.

김윤종 기자 zozo@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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