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 음악 기행]伊 볼로냐

  • 입력 2005년 4월 14일 16시 53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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볼로냐는 이탈리아와 중부 유럽을 연결하는 요충지로 예부터 교역의 중심지로 번영해 왔으며 지성(知性)의 중심지로도 각광을 받아 온 곳이다. 왼쪽에 산 페트로니오 대성당이 보인다. 사진 정태남 씨
볼로냐는 이탈리아와 중부 유럽을 연결하는 요충지로 예부터 교역의 중심지로 번영해 왔으며 지성(知性)의 중심지로도 각광을 받아 온 곳이다. 왼쪽에 산 페트로니오 대성당이 보인다. 사진 정태남 씨
《모차르트는 빚 갚을 길이 막막해 죽었다는 소문을 퍼뜨리고 장례식을 가짜로 치르게 한 뒤 잠적해버린다.

세월이 흐른 뒤 그는 이탈리아에 잠입해 재능이 없는 로시니의 음악 선생이 되어 로시니의 이름으로 작곡해준다.

이는 이탈리아 작곡가 세르지오 렌디네의 현대 오페라‘중대한 비밀’의 줄거리다. 이 오페라는 모차르트의 무덤이 없다는 점, 로시니와 모차르트 간의 음악적 유사성이 있다는 점, 로시니가 37세 이후 오페라를 더 이상 작곡하지 않은 점 (그무렵 72세가 되는 모차르트는 죽었거나 아니면 늙어서 더 이상 작곡을

해줄 수 없었을 것이다) 등에서 힌트를 얻어 만든 작품이다.

모차르트는 1791년 12월 5일에 죽었고, 로시니는 1792년 2월 29일에 태어났으니 두 사람은 실제로는 만날 수 없었다.

그러나 ‘중대한 비밀’의 줄거리처럼 모차르트가 죽지 않고 로시니의 선생이 되었다면 이들이 만난 곳은 아마 볼로냐가 아니었을까?

모차르트는 소년 시절 이곳에서 몇 달 동안 공부한 적도 있으니 볼로냐는 낯선 곳이 아니었을 게다.》

○ 산 페트로니오 대성당 ‘볼로냐 악파’의 요람

플랑드르 출신 조각가 잠볼로냐의 넵투누스 분수. 힘이 넘쳐흐르면서도 우아하다.

고색창연한 건물들이 즐비한 볼로냐 중심가의 길은 특이하다. 대부분 회랑식으로 되어 있어서, 비가 오더라도 우산이 필요 없고 땡볕이 내리쬐어도 그늘에서 길을 갈 수 있다. 골목골목마다 옛 성당들이 눈에 띈다. 볼로냐는 1789년 프랑스 점령하에 놓이기 전까지 약 3세기 동안 로마 교황령에 속해 있을 때 로마 다음으로 중요한 도시였다. 따라서 이곳에는 많은 종교 단체가 활동했고, 수많은 성당과 수도원이 세워졌다.

이러한 종교적 환경은 볼로냐 음악 문화에도 지대한 영향을 끼쳤는데, 특히 산 페트로니오 대성당은 ‘볼로냐 악파’의 산실이 됐다. 기원이 1390년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이 대성당은 이탈리아에서 규모가 가장 큰 종교건축물 가운데 하나이지만 다른 도시의 화려한 대성당들과는 달리 장식이 별로 없고 수수하기만 한다.

하지만 대성당 내부는 뛰어난 음향을 자랑한다. 이곳을 중심으로 17세기 중반부터 18세기 초 30∼40년에 걸쳐 활동했던 음악가들을 ‘볼로냐 악파’라고 한다.

이들은 마치 대성당의 수수한 겉모습처럼 화려한 기교를 표면에 드러내지 않고, 균형 잡힌 구조를 바탕으로 하는 서정성을 추구했다.

산 페트로니오 대성당이 볼로냐 음악의 요람이라면 유럽 최초로 설립된 볼로냐 대학은 음악을 학문적으로 연구하는 음악 이론의 요람이었다.

이에 덧붙여, 교황청이 인정하는 국가 최고의 음악 연구기관

‘아카데미아 필아르모니카(Accademia filarmonica)’는 볼로냐의 음악문화 발전에 촉매 역할을 했다. 볼로냐는 다른 곳에서 보기 드문 풍부한 음악적 환경을 자랑하던 곳이었다.

한편 아카데미아 필아르모니카의 인물 중에서 가장 유명했던 이는 마르티니 신부다. 그의 명성은 유럽 전역에 퍼져, 당시 유명한 음악가들은 그와 교신했으며 그에게 작곡 지도를 받기 위해 많은 음악가가 직접 볼로냐로 몰려들었다. 14세의 모차르트도 그중 한 사람이었다.

○ 천재 음악가 유혹한 知性의 도시

산 페트로니오 대성당 근처에는 중세의 탑 2개가 시내 중심가의 시야를 압도한다.

이곳에서 잠보니 거리를 따라 가면 조그만 로시니 광장이 나오고, 광장에는 옛 수도원을 개조한 마르티니 음악원이 있다. 로시니가 1806년에서 1810년까지 음악교육을 받은 곳이다. 그의 스승 타데이 신부는 모차르트를 가르쳤던 마르티니 신부의 후임으로 독일어권의 기악 음악에 대해 매우 박식했다.

따라서 로시니는 당시 기악 음악이 뒤처져 있던 이탈리아에서 모차르트와 하이든의 음악을 접하면서 리듬의 중요성을 터득할 수 있었던 극소수의 젊은 음악가 중 한 사람이었다.

오페라 ‘중대한 비밀’에서 묘사된 것과 달리, 로시니는 보기 드문 천재였다. 그는 악상이 떠오르면 피아노 건반을 두들겨 확인할 필요도 없이 그대로 악보에 써 내려갈 정도였으며, 곡을 쓰는 속도도 숨이 가쁠 정도로 빨랐다고 한다.

만약 모차르트가 볼로냐에 잠입했더라면 틀림없이 그를 만나보지 않았을까?

아무리 훌륭한 재능도 그것을 꽃피게 하는 토양이 없으면 썩고 만다.

이탈리아 동부해안의 페자로에서 태어난 로시니는 1804년 일찌감치 부모를 따라 볼로냐로 이주해 이곳의 유서깊고 풍부한 음악적 토양에서 성장했다.

이런 의미에서 본다면 로시니를 낳은 곳은 페자로이지만 ‘음악가 로시니’를 낳은 곳은 볼로냐인 것이다.

정태남 재이탈리아 건축가 www.tainam-jung.com

▼숱한 작곡가 길러낸 ‘볼로냐 음악원’▼

플랑드르 출신 조각가 잠볼로냐의 넵투누스 분수. 힘이 넘쳐흐르면서도 우아하다.

마르티니 음악원으로도 불리는 볼로냐 음악원은 유명한 음악가들이 거쳐 간 곳이다. 로시니는 1839년부터 10년간 명예고문으로 활동했고, 1913년에는 페루치오 부조니가 학장이 되어 실기 위주의 콘세르바토리오(음악원)의 면모를 갖췄다. 1919년에서 1923년까지 학장을 지낸 프랑코 알파노는 푸치니가 미완성으로 남긴 오페라 투란도트의 마지막 부분을 완성한 주인공. 볼로냐 음악원 출신의 음악가로는 로시니 외에 볼로냐 태생의 레스피기를 꼽을 수 있다.

이 음악원의 도서관에는 6만 권의 서적과 수많은 문헌이 소장되어 있는데, 그중에는 마르티니 신부가 평생을 두고 수집한 게 상당 부분을 차지한다. 로시니와 레스피기의 유품과 300여 점에 달하는 음악가 초상화들도 눈길을 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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