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희 글씨’ 수난시대 오나…광화문 현판교체 논란 증폭

  • 입력 2005년 1월 25일 18시 05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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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종로구 세종로의 충무공 이순신 동상(왼쪽). 동상의 글씨도 박정희 전 대통령이 직접 쓴 것이다. 동아일보 자료 사진
서울 종로구 세종로의 충무공 이순신 동상(왼쪽). 동상의 글씨도 박정희 전 대통령이 직접 쓴 것이다. 동아일보 자료 사진
문화재청이 박정희(朴正熙) 전 대통령의 친필 광화문 현판 교체를 추진하기로 함에 따라 박 전 대통령의 다른 현판 글씨 교체 여부도 관심을 모으고 있다. 박 전 대통령은 재임 당시 전국적으로 문화재 복원사업을 펼치면서 시멘트와 철근콘크리트로 많은 건물을 짓고 자신의 글씨로 현판을 내걸었다.

충남 아산시의 현충사(顯忠祠·사적 제155호·이순신 장군의 사당) 현판, 경기 파주시의 화석정(花石亭·경기도유형문화재 제61호) 현판, 경기 수원시 화령전(華寧殿·사적 제115호·정조의 사당)의 운한각(雲漢閣) 현판, 경북 안동시의 영호루(映湖樓) 현판 등이 대표적이다.

박 전 대통령의 글씨가 걸린 유적들은 박 전 대통령 시절에 복원되거나 개축됐지만 원형이 있다는 점에서 교체 대상으로 거론될 수 있다.

▶ 박정희 前대통령 공방 문화계까지 확산 (POLL)

이 경우에는 문화재위원회나 지방문화재위원회의 심의를 거쳐야 한다. 이 중 운한각 현판은 화성행궁 복원사업의 일환으로 지난해 12월 경기지방문화재위원회의 심의를 거쳐 24일 서예가 정도준(鄭道準) 씨의 글씨로 바뀌었다. 문화재청은 다른 현판에 대해서는 “교체할 계획이 없다”고 밝혔다.

박 전 대통령의 글씨가 유적지에 있다 하더라도 아예 새로 지은 건물에 걸린 경우도 많다. 경기 고양시 행주산성(사적 제56호) 내 행주대첩비와 충장사(忠莊祠·권율 장군의 사당) 현판, 경기 여주군 영릉(사적 제195호) 내 세종전(세종의 유물전시관)과 훈민문(訓民門) 현판, 강원 강릉시 오죽헌(보물 제165호) 내 문성사(文成祠·율곡 이이의 사당) 현판, 경북 안동시 하회마을 내 영모각(詠慕閣·서애 유성룡의 유물전시관) 현판, 대구 달성군 순천 박씨 집성촌에 세워진 육신사(六臣祠·사육신 사당) 현판, 인천 강화도 전적지 보수화 정화 기념비 등이 그런 경우다.

이 건물들도 문화유적 내에 존재하기 때문에 현판 글씨를 바꾸려면 문화재위원회나 지방문화재위원회의 심의를 거쳐야 한다. 문화재청이나 해당 지자체는 이에 대해서도 “아직 교체 계획이 없다”고 밝혔다.

기념물에도 박 전 대통령의 글씨가 있는 경우가 있다. 서울 종로구 세종로 이순신 장군 동상, 새마을운동의 발상지인 수원농민회관, 서울 은평구 구파발 통일로 들머리 ‘통일로’ 비석, 서울 홍제동∼독립문 도로를 확장하면서 세운 ‘무악재’ 비석 등의 글씨가 그것이다. 이 경우에는 문화재로 지정되지 않았기 때문에 지자체장이 교체를 결정할 수 있다.

박 전 대통령의 글씨 중 이미 교체가 이뤄진 경우도 있다. 서울 종로구 종로2가 탑골공원 정문인 ‘삼일문’에는 1967년 박 전 대통령이 쓴 글씨가 걸려 있었으나 2001년 한국민족정기소생회 회원들이 파손해 현재는 독립선언서에서 집자한 글씨로 바뀌었다.

파손 소동 겪은 탑골공원 현판
2001년 민족정기소생회 회원들이 파손한 서울 종로구 탑골공원의 박정희 전 대통령 친필 ‘삼일문’ 현판(위)과 2003년 독립선언서에서 활자를 골라 교체한 현재의 현판. 동아일보 자료 사진

2003년 5월 전남 영암군 월출산 도갑사의 해탈문(국보 제50호) 한자 현판도 박 전 대통령의 글씨에서 조선후기 명필인 원교 이광사(圓嶠 李匡師)의 글씨를 본떠 새긴 것으로 바뀌었다. 그러나 이는 문화재위원회의 심의를 거치지 않은 무단 교체로 밝혀졌다.

당시 현판을 바꾼 범각(梵覺) 전 주지 스님은 “한문 현판 글씨가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쓰인 데다 글씨가 너무 작다는 문화재 전문가의 지적이 있어 전남 해남군 대둔사 이광사의 해탈문 글씨를 본떠 새긴 글씨로 교체했을 뿐 문화재위원회의 심의를 거쳐야 하는 줄은 몰랐다”고 말했다.

권재현 기자 confetti@donga.com

이 기사의 취재에는 본보 대학생 인턴기자 선승혜 씨(서울대 언론정보학과)가 참여했습니다.

▼YS-DJ, 휘호 즐겼지만 기념물 거의 없어▼

박정희 전 대통령과 달리 다른 대통령들은 현판이나 기념물로 된 글씨를 많이 남기지 않았다.

이승만(李承晩) 전 대통령은 관동팔경의 하나로 꼽히는 강원 고성군 ‘청간정(淸澗亭·강원도 유형문화재 32호)’ 현판과 서울 종로구 보신각(普信閣·서울시 기념물 10호) 현판에 글씨를 남겼다. 또 경남 합천군 해인사 해탈문 뒤쪽에 걸려 있는 ‘해인대도량(海印大道場)’, 경북 영주시 부석사의 현판, 경기 오산시의 ‘세마대(洗馬臺)’ 현판, 서울의 경국사(慶國寺)와 문수사(文殊寺)의 현판도 이 전 대통령의 글씨다.

전두환 전 대통령이 경남 합천에 남긴 현판. 동아일보 자료 사진

전두환(全斗煥) 전 대통령은 서울 국립중앙도서관 앞 바위에 ‘국민독서교육의 전당’, 예술의 전당 음악당 앞 바위에 ‘문화예술의 창달’이라는 글씨를 남겼다. 경찰청 현관에도 전 전 대통령이 쓴 ‘호국경찰(護國警察)’ 글씨가 걸려 있었으나 지난해 말 떼어냈다. 한국은행 서울 신관 1층에도 전 전 대통령이 쓴 ‘통화가치 안정’이 대리석에 새겨져 있었으나 1998년 서예가 김기성 씨가 쓴 ‘물가안정’으로 바꿔 달았다. 이 밖에 강원 인제군 백담사 ‘극락보전(極樂寶殿)’이라는 법당 현판과 2001년 완공된 합천 소재 임란창의기념관의 ‘창의사(彰義祠)’ 현판도 그의 글씨다.

노태우(盧泰愚) 대통령의 글씨는 서울 예술의 전당 오페라극장 앞 바위의 ‘예술창조의 샘터, 문화국가의 터전’과 대구 동화사의 ‘통일기원대전(統一祈願大殿)’ 현판이 있다.

김영삼(金泳三) 전 대통령은 고향인 경남 거제시 해금강 휘호비에 ‘천하절경해금강(天下絶景海金剛)’이란 글씨를 썼고, 김대중(金大中) 전 대통령도 고향인 전남 목포시 종각에 ‘새 천년의 종’이라는 한글 글씨를 남겼다. 김대중 전 대통령은 국가정보원 원훈석(院訓石)에 ‘정보는 국력이다’라는 글씨를 썼으나 그 뒷면에 새겨진 ‘대통령 김대중’이라는 글귀는 지우게 했다.

권재현 기자 confetti@donga.com

'박정희 필체' 교체에 네티즌 찬반공방 치열

광화문 현판의 박정희 전 대통령 한글 친필을 정조의 한문 글씨로 바꾸려는 문화재청의 방침에 누리꾼들의 찬반 공방이 뜨겁다.

일각에선 개혁군주인 정조의 이미지를 현 정부와 연결시키려는 정치적 의도가 있는 것이 아닌지 의혹의 시선도 보내고 있다.

광화문 현판 교체를 주도한 유홍준 문화재청장이 지난해 10월 노무현 대통령과 접견한 자리에서 “(노대통령이)정조와 닮은 점이 많다”고 얘기한 사실이 이런 의혹을 증폭시키고 있다.

현재 문화재청 게시판은 주민등록번호까지 밝혀야 글을 쓸 수 있음에도 수백건의 항의 글이 올라오고 있다.

ID가 ‘개울가가재’라는 누리꾼은 “현판 교체의 옳고 그름을 떠나 정조와 개혁을 운운한 청장의 말에 할말을 잃었다”며 “현정권에 어울려서 바꾸고, 어울리지 않는다는 이유로 폐기한다면 어떤 사람이 이해할 수 있겠냐”고 반문했다.

‘남경래’는 “왜 꼭 지금 교체하려는지 모르겠다”며 “교체가 그렇게 중요한 것이라면, 복원을 마친뒤 역사적 검증을 거쳐서 해도 될 것”이라고 말했다.

‘그대로’는 “68년 재건 당시 국가원수의 친필로 제작된 현판도 역사의 자료이자 문화재”라며 “광화문이라고 쓴 적도 없는 옛 임금의 글씨를 집자한 현판이 대체 무슨 의미가 있겠나”고 말했다.

‘김재복’은 “훗날 광화문 안내판과 운한각 안내판에는 ‘모씨가 박정희 전 대통령을 싫어해서 마음대로 현판을 갈아치웠다’는 문구가 게재될 지도 모르겠다”고 말했다.

‘이동환’은 “전에 유 문화재청장 책을 읽고 정말 열정적인 분이라고 믿고 좋아했는데, 실망이다”고 말하기도 했다.

반면 문화재청의 방침에 환영하는 글도 있었다.

이들은 박 전 대통령의 한글 현판은 경복궁에 맞지 않는다며 역사 유물의 복원이라는 관점에서 봐야 한다고 지적했다.

‘박일선’은 “독재자의 글을 아직까지 문화재로 갖고 있다는 것은 수치”라며 “광화문 현판을 그대로 두면 독재자 김정일의 그림을 소장하는 것과 다를바 없다”고 주장했다.

‘rea2002’는 “노무현 대통령 글씨로 현판을 만들자는 게 아니지 않는가”라며 “지금 필요한 것은 정조의 개혁 정신이다. 국가의 원수가 역사적 인물을 표방하고자 하는 것은 칭찬해 주어야 할 일”이라고 교체를 옹호했다.

‘park0121kr’는 “독재자 박정희의 현판을 끌어내리는 데 왜들 반대하냐”며 “조선시대 궁궐 문에 대한민국 대통령 글씨가 있다는 게 망신살이다. 박 대통령의 글씨는 박물관에서나 보관하는 것이 낫다”고 주장했다.

‘현판 교체’에 관한 인터넷 여론조사 결과 역시 찬반이 갈렸다.

포털사이트 네이버의 경우 11828명이 참여한 가운데 51.7%의 누리꾼들이 현판교체를 반대했으며, 48.2%는 찬성했다.

이런 와중에 박 전 대통령이 경기도 수원시 화령전(사적 115호)의 운한각에 쓴 현판도 24일 교체됐다.

수원시 화성사업소 관계자는 “1966년 박 전 대통령이 쓴 운한각 한문 현판이 낡고 오래돼 바꿨다”고 말했다.

최현정 동아닷컴기자 phoebe@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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