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예술]‘왜 나는 시인인가’…김춘수의 ‘맨얼굴’

  • 입력 2005년 1월 14일 16시 44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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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작고한 김춘수 시인. 동아일보 자료사진
지난해 작고한 김춘수 시인. 동아일보 자료사진
◇왜 나는 시인인가/김춘수 지음 남진우 엮음/432쪽·1만 원·한국문학

문학평론가 남진우 씨가 김춘수 시인(1922∼2004)이 남긴 에세이와 칼럼을 골라 한 권의 책으로 엮었다. 시에서는 잘 보이지 않았던 ‘맨 얼굴 김춘수’가 드러난다. 무엇보다 눈길을 끄는 대목은 그가 왜 평생 이데올로기나 관념 같은 ‘의미’를 걷어 낸 ‘무의미시’를 쓰게 되었는가를 추정할 수 있게 하는 회고담이다. 도쿄 유학 시절 사상범으로 반 년간 옥고를 치를 때 만난 한 노인의 이야기다.

‘그는 (공산주의) 사상범이었다. … 조금 있자, 사환이 쟁반에 갓 구운 빵을 서너 개 얹어 들고 왔다. … 갓 구운 빵 따위는 특권층이 아니면 얻어 볼 수가 없다. (그것은) 노인이 자기의 사상과는 아랑곳없이 인민대중과는 거리를 두고 있다는 증거다. 그런 모순을 그는 충분히 짐작하고 있었을 것인데 태연히 그것(빵)을 먹고 있었다.’

김이 오르는 빵 냄새 때문에 청년 김춘수의 눈과 창자는 노인 쪽으로 줄곧 쏠렸다. 그러나 노인은 그의 시선을 의식적으로 피하면서 빵을 모두 먹어 치웠다고 한다. 시인의 단상은 이어진다.

‘교단에서의 그는 한 사람의 휴머니스트요, 식민지나 민족을 무시하는 진보적 사상가임에 틀림없다. … 대학 구내에서 그런 일이 있었다면 그 빵 세 개를 나에게 모조리 다 건네주었을는지도 모른다. … 그러나 그곳은 아무도 보고 있지 않는 유치장의 취조실이다. 나는 간혹 생각한다. 그가 어쩌다 그때의 그 장면을 머리에 떠올릴 때 이유야 어떻든 얼마나 견디기 어려운 자기혐오의 역겨움에 빠지게 될까? … 사람이 참으로 하나의 이념을 감당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가?’

시인의 산문은 책 제목대로 ‘왜 나는 시인인가?’에 집중되어 있다. ‘존재하는 것의 슬픔을 깊이깊이 느끼고 이해하려고 노력하기 때문에 나는 시인이다’라고 언명하는 시인은 ‘시인은 될 수 있다면 걷는 것이 좋다’ ‘넥타이 같은 것도 매지 말고 모닝코트나 턱시도를 입지 말아야 한다’ ‘나귀를 타고 패랭이꽃이 핀 시골길을 가야 한다. (시인은) 그런 기분으로 살아야 한다’ 같은 치열한 시인상(詩人像)을 스스로 다짐한다. 그리하여 노 시인의 입에서 터져 나오는 참다운 시인, 지성인의 모습은 절규처럼 들린다.

‘진보니 역사니 이데올로기니 하는 말들을 싫어할 뿐 아니라 관념으로는 무시하기 때문에 나는 시인이다. 내재적 접근이니 경계인이니 하는 알쏭달쏭한 말, 즉 궤변으로 사태를 호도하려는 사이비 지식인을 싫어하고 미워하기 때문에 나는 시인이다. 지식인과 지성인을 구별해서 대하기 때문에 나는 시인이다. … 지성인은 솔직해야 한다. 허세를 부리지 말아야 하고 ‘체’하는 쇼맨십 같은 건 생리적으로 싫어하는 자질의 사람이어야 한다. 아직 여기에 미달이기 때문에 스스로 지성인임을 말하지 못하겠다고 자인하고 자백할 수 있기 때문에 나는 시인이다.’

순수를 갈망하고 남다른 순결 벽의 소유자였던 시인은 한때 정치에 몸담았던 이력이 있다. 이와 관련한 엮은이의 글은 시인의 문학적 성과에 집중한 한층 깊이 있는 시선을 주문하고 있어 소개할 만하다.

‘산문을 통해 보여 지는 시인은 (…) 소심하면서도 성실한 지식인-예술가의 모습이다. … 문제는 우리 현대사가 이런 고독을 즐기는 예술가를 그냥 방치해 두지 않고 이른바 역사의 현장으로 굳이 불러들여 대중 앞에 억지로 서게 하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는 점이다. … 그런 점에서도 김춘수 시인에 대한 본격적인 연구는 더욱 조심스럽게 이루어질 필요가 있다.’

허문명 기자 angelhuh@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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