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서정신]人情은 역경을 녹인다

  • 입력 2004년 12월 31일 17시 48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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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새해일까. 시간의 흐름에는 마디가 없는데 사람들은 1년이라는 마디를 만들어 그 전의 시간들을 마무리하고 싶어 한다. 그리고 그렇게 마무리된 시간의 뭉텅이를 지난해로 이름 짓고 떠나보내려 한다.

왜일까. 삶은 늘 지치도록 고된 것이기에, 사람에게 제일 무서운 것은 사람이기에, 실망과 슬픔과 어려움은 언제나 하나가 아니라 두셋씩 짝을 지어 찾아오기 마련이기에, 우리는 그 어려움의 기억을 다 짊어지고 살아가기 싫어서 얼마만큼은 뚝 떼어 버리려는 것이 아닐까.

정말이지 2004년의 많은 부분은 뚝 떼어 내 저 남아시아의 지진해일 속으로 던져 버리고 싶을 만큼 어둡고, 심란하고, 슬프고, 괴로웠다. 국제통화기금(IMF) 구제금융 사태 때보다 훨씬 더 어렵다는 중소기업인과 시장 상인들의 한숨 속으로, 우리 교육시스템에는 미래가 없다며 아이들과 함께 이 땅을 떠나버린 엄마들의 처진 어깨 사이로 한 해가 가고 있었다. 뉴스 채널을 돌려 버리고 싶을 정도로 끝이 보이지 않는 정치 싸움과 거친 말들의 공방 속에서 봄이 겨울로 흘러갔다. 택시를 타면 내리고 싶을 정도로 택시 운전사들은 정치를 비판하는 대화를 유도하거나 자신의 일방적인 성토를 기어코 듣게 만들었다.

▼의인 김행균, 빵집천사…▼

2004년은 많은 부분을 잊고 싶은 시간이었다.

사람들은 2005년이라고 다른 법이 있느냐고 묻는다. 삶의 내용면에서 본다면 크게 다르지 않을 수 있다. 경제적으로나 정치적으로 뾰족한 타개책이 나와 있지 않기 때문이다. 상당기간 나오기도 힘들 것 같다. 하지만 우리 국민이 보통 국민인가. 미련하게 휩쓸리는 듯 보여서, 20여 년 전인가 어느 외국 장성은 우리 국민이 들쥐 떼 같다고 혹평도 했지만 대한민국 국민만큼 산전수전 다 겪고도 의연하게 하루를 챙겨내는 국민도 없다.

정치지도자들이 나랏돈을 내 돈인 양 떼어먹는 세상에, 상사의 구박에도 불구하고 인허가의 정당한 기준을 들어 시설물 허가에 이의를 제기한 7급 여성 공무원이 있는 나라다. 고속철도의 도입에서 겨우겨우 운행에 이르기까지 정부의 얼굴 없는 정책 책임자들이 초래한 엄청난 시행착오가 아직도 국민의 혈세를 축내고 있지만 어린아이를 구하려고 철로에 뛰어들었다가 자신의 다리가 잘린 아름다운 철도원 김행균 씨가 존재하는 나라다.

빈민대책, 실업정책보다는 과거청산문제로 삿대질을 하고 있는 정치가들 모습이 쇼윈도 텔레비전을 뒤덮고 있는 추운 길거리에서 장애인 걸인에게 빵을 떼어 먹여 준 빵집 천사 길지빈 씨, 그리고 그 모습을 찍어 자신의 홈페이지에 올린 박새봄 씨와 “강남역 빵집 아가씨가 만든 감동 바이러스가 지금 인터넷을 행복하게 감염시키고 있다”며 함께 울고 웃은 수많은 누리꾼(네티즌)들이 사는 나라가 바로 대한민국이다.

경제가 최악이라지만 2004년의 구세군 냄비에는 예년보다 15% 더 많은 성금이 모였다고 한다. 어려운 가운데서도 작은 기부가 오히려 늘어난, 인정이 메마르지 않은 나라다.

정치문화를 가르치던 한 원로교수는 대한민국 국민의 의식수준은 정치적 엘리트로 올라갈수록 일반 국민에 비해 현저하게 낮아진다면서 국민의 수준에 맞는 정치지도자가 나올 때까지 국민의 고생은 계속될 것이라고 한탄하기도 했다.

▼새해도 감동 바이러스를▼

하지만 우리나라 국민은 미련할지는 몰라도 몽매하지는 않다. 자신들보다 수준이 낮은 정치지도자들이 만들어 내고, 나 몰라라 방치한 이 고생을 이를 악물고 견뎌 내면서도 훈훈한 인정의 여유를 간직한 사람들. 식민 지배와 전쟁의 역경 속에서 어쩔 수 없이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던 타 문화를 융합해 이웃나라에까지 진한 감동을 전하는 한류 노래와 드라마의 꽃을 피울 정도로 뛰어난 문화적 멋과 창조성을 가진 사람들. 춥고 배고팠던 시절을 잊지 않고 지금의 고생을 이겨 내려는 짠돌이 카페의 40만 회원들처럼 강인한 우리들이 맞이하는 2005년은 2004년보다 더 나을 것이라는 희망을 품어본다.

서정신 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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