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광장/홍찬식 칼럼]몰입의 소중함

  • 입력 2004년 12월 10일 17시 51분


코멘트
올해 TV광고 가운데 가장 성공한 작품은 만화영화 ‘캔디’의 주제가를 사용한 광고가 아닌가 싶다. 탤런트 김희애가 ‘외로워도 슬퍼도 나는 안 울어’를 부르며 남편을 위로하는 광고는 혹독한 경제난에 빠진 서민들에게 잔잔한 감동을 선사했다. ‘아빠 힘내세요, 우리가 있잖아요’로 시작되는 광고도 마찬가지로 TV광고가 국민을 격려하고 나선 사례다.

두 편의 광고는 어쩌면 올 한 해 우리의 자화상(自畵像)이다. 경제는 바닥을 헤매고 정치는 한 가닥 희망조차 던져주지 못한 2004년의 우울한 현실이 광고 속에 녹아 있다.

▼‘캔디’ 광고와 ‘배용준 열풍’▼

올 한 해 일본을 휩쓴 ‘배용준 열풍’은 그나마 기분 좋은 사건이 될 것이다. 우리 대중문화의 경쟁력을 보여줌과 동시에 문화산업이라는 것이 얼마나 국익에 기여할 수 있는지 실감케 했다.

일본에서의 배용준 열풍은 2년 전 한국에서 벌어진 ‘월드컵 열기’를 연상시킨다. 입장을 바꿔 일본의 연예인이 한국에서 그만큼 인기를 끌 수 있을까 상상해 보면 아마 불가능할 것이다. 배용준에 대한 일본인의 열광적인 반응을 우리가 정확히 이해하기는 쉽지 않다. 우리 마음속에 아직 생생한 ‘월드컵 열기’도 일본인 입장에선 완벽하게 이해하기가 힘들 것이다. 그럼에도 두 현상의 공통점을 꼽자면 ‘몰입의 즐거움’이다.

몰입이란 특정한 일에 만사를 제쳐놓고 몰두하는 것이다. 배용준의 얼굴을 직접 보기 위해 일본에서 서울로 날아오고 촬영장소인 남이섬을 방문하기를 열망한다. 팬들은 배용준의 일거수일투족을 속속들이 꿰고 있고 배용준이라면 시간과 돈을 아끼지 않는다. 배용준에 몰입하지 않으면 일어날 수 없는 일이다. 돌이켜 보면 ‘월드컵 열기’도 한국인이 경험한 집단적 몰입이었다. 한국팀의 승전보가 속속 전해지면서 한국 사회는 축구 속으로 깊이 빠져 들어갔던 것이다.

몰입의 경험은 인생을 가치 있고 행복한 삶으로 만들어준다. 학창 시절 어느 한 가지 취미생활이나 운동에 몰두했던 체험은 두고두고 삶의 기쁨으로 기억된다. 남들이 하찮게 여기는 직업도 본인이 진정으로 몰입해 일할 수 있다면 그 이상의 행운은 없다. 삶의 질은 ‘삼매경’이나 ‘무아지경’처럼 깊이 빠져드는 몰입을 통해 높아진다는 사실을 우리는 월드컵에서 몸으로 확인한 바 있다.

몰입의 또 다른 장점은 각 분야 전문가를 양산해 낸다는 점이다. 한국에서 월드컵이 전문가급 축구팬을 숱하게 만들었듯이 배용준 열풍은 일본 내에 수많은 ‘한국 전문가’를 만들어 내고 있다. 모든 분야에서 전문가 층이 빈약한 한국에서 몰입의 강도가 높아진다면 장기적으로 국가적 역량을 키우는 일이 될 것이다.

그러나 한국 사회에서 몰입은 쉽지 않은 일이다. 월드컵에서 집단적 몰입은 ‘단군 이후 최초’이라는 수식어가 따라다닐 정도로 매우 이례적인 체험이었다. 대학에 진학할 때 본인의 적성, 희망보다는 졸업 후 얼마나 돈을 벌 수 있느냐를 기준으로 전공을 결정한다. 인생의 출발부터 스스로 몰입할 수 있는 일하고는 상관없이 이뤄지는 것이다. 여가활동에서도 한국인은 무척 어설프다. 이제 여가활동에 눈을 뜬 단계이니 몰입 얘기를 꺼내려면 시간이 더 지나야만 한다.

▼2004년에 돌아보는 행복▼

지구상에서 행복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을 연구한 결과를 보면 경제적인 넉넉함과 함께 필수적인 조건이 정치적 안정이다. 오히려 돈은 많지 않아도 정치적으로 안정된 사회에서 살아가는 쪽이 행복한 삶에 더 가까울 수 있다. 매일 국민 앞에서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하고 있는 한국의 정치인들은 엄청난 죄를 짓고 있는 셈이다.

한국의 정치, 경제가 하루아침에 나아질 것 같진 않다. ‘월드컵 4강’ 같은 짜릿한 일이 자주 있을 수 있겠는가. 그렇다면 자신과 가까운 곳에서 몰입을 통해 스스로 행복지수를 높여가는 것이 훨씬 현명하고 현실적인 삶의 방식이다. 올해 한국 사회의 명암은 지극히 평범한 진리를 다시 일깨워 주고 있다.

홍찬식 논설위원 chansik@donga.com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댓글 0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