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예술]‘유목과 은둔’…세상에 고백성사를 하다

  • 입력 2004년 12월 3일 16시 58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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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목과 은둔/김지하 지음/304쪽·8500원·창비

유목과 은둔

의리(義理)가

낮은 샘가에 피묻은 채 머물고

온 허공에 수만가지 꽃, 꽃들이

어지러이 피어

어찌 나갈까

저 먼 쓸쓸한 바다까지

가 마침내 내 두 아이를

만나 기어이

데리고 돌아올까

유목과 은둔의 집이여

오랜 내 새 집에.》

생명을 말해 온 김지하가 아홉번 째 시집에서 ‘노병사(老病死)’를 말하고 있다. 문단 거장의 유약한 내면을 보는 일은 쓸쓸한 일이기도 하지만, 삶은 누구에게나 공평하다는 자각을 주어 현실에 지친 우리를 위무한다. 사진 제공 창비

김지하가 늙었다. ‘입만 열면/생명을 말’(‘오늘’ 중)해 온 그가 이제 ‘노병사(老病死)’를 말하고 있다. 그는 ‘책을 읽으면/두 눈이 쓰라리고/글을 쓰든가 먹을 잡으면/정신이 왼통 어지러운’(‘선풍기 근처에’ 중) 예순넷 나이에 이제 ‘늙어 가는 길/외로움과 회한이/가장 큰 병이라는데’ ‘죽음 그 밖에는 아무 것도 없다’고 말하고 있다.

한때 민주화운동과 예술운동의 사상적 거점으로 존재했던 시인이자 사상가 김.지.하. 그러나 2002년 여름 무렵부터 써왔다는 시 94편을 묶은 아홉 번째 시집 ‘유목과 은둔’에는 생활인 김지하, ‘궁극적 개인’ 김지하가 여과 없이 담겨 있다.

‘털털털 다 털고 나서/떠나도 되겠구나!/단 하나//막내 놈/그림 공부 밑천은 어떻게든/벌어놓고/…/진리고 혁명이고 유토피아고//모두 다/허허허/강 건너 등불.’ (‘강 건너 등불’ 중)

그렇다. 김지하도 결국, 한 인간에 불과했다. 그 역시 보통의 인간들과 마찬가지로 늙고, 병들고, 죽는, 그리하여 그것을 고뇌하고 두려워하며 나머지 생을 살아가는 소외된 존재였다. 평생 조직이나 생활에 묶이는 법 없이, 제도와 화합하는 법 없이, 마음먹은 대로 방랑하고 행동했던 자유인 김지하.

화려한 이력과 수사를 걷어낸 거장의 내면을 보는 일은 쓸쓸한 일이기도 하지만, 새삼 삶은 누구에게나 공평한 것임을 깨닫는 일이어서 힘든 삶에 위안을 준다. 그리하여 사람을 겸손하고 착하게 만든다.

청춘시절에는 추하고 병든 것을 사랑했을 그는 이제 ‘나이가 들면서 거꾸로 우아하고 건강하고 아름다운 것을 더 좋아하게 되었다’(‘귀향’ 중)고 말한다.

‘시를 쓸 때는/목숨을 걸었었다//열여섯부터 그랬다/왜 그랬을까//컴컴한 사창가 언저리를/배회하다 배회하다/가등 밑 전봇대에 수첩을 대고/연필 꾹꾹 눌러서/기괴하고 사악한 몇 마디/갈겨쓰기도 하고//불 꺼진 자취방에 슬금 돌아와/어둠 속에서 수음을 하기도 했다//이 모든 날들의 우울을 깨알같이 적어/검은 노트라 이름 지었으니/그 무렵/자유당 말기의/내 정신풍경을 한마디로 뭐라 할까//매독환자/아니면/아편쟁이/…/증오와 격정과 비탄의 날들//또 알코올과 색정의 그 숱한 밤들, 새벽들!/…/그래//이제는 아무 것도/아무 것도 없고//외로움밖에 없고//후회할 일밖에 없으니//참/개똥같은 인생이다.’(‘김지하 옛 주소’ 중)

그는 지난 2년 동안 ‘동대문/이대병원’ ‘외래’에 다니며 ‘정신신경과’ 치료를 받았고 ‘좌골신경통’을 앓아 수시로 ‘중국 연길에서 사 온/호랑이 고약 파스를 붙였고’ 거의 매일 아내와 ‘함께 뜸뜨러 여의도’에 다녔다. 온갖 병에 시달리면서 허전하고 쓸쓸한 삶을 살고 있는 요즈음의 삶을 그는 ‘시 짓고/그림 그리고//가끔은/후배들 놀러와//고담준론도 질퍽하게/아아/무엇이 아쉬우랴만//문득 깨닫는다//죽음의 날이 사뭇 가깝다는 것’이라고 시 ‘김지하 현주소’에서 밝히고 있다.

분노와 증오가 가득했던 젊은 날을 보내고, 이제 한없이 여린 한 인간으로 돌아와 세상과 사람에게 고백성사를 바친 시인의 언어가 온통 싸움의 에너지로 가득한 세상을 순하게 만드는 힘이 되길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

허문명 기자 angelhuh@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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