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시]김환기 추모전 ‘사람은 가도 예술은 남다’를 보고

  • 입력 2004년 10월 24일 18시 13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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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환기 화백이 1951년 부산 피란 시절에 그린 ‘항아리와 여인들’. 6·25전쟁 기간 중임에도 백자항아리와 여인들에게서 따뜻하고 푸근한 정감이 느껴진다. -사진제공 환기미술관
김환기 화백이 1951년 부산 피란 시절에 그린 ‘항아리와 여인들’. 6·25전쟁 기간 중임에도 백자항아리와 여인들에게서 따뜻하고 푸근한 정감이 느껴진다. -사진제공 환기미술관
그림은 세상을 꿰뚫어 보려는 화가의 시선(視線)이다. 그 시선이 남다르게 신선하다면 성공한 예술가로 평가받고도 남는다. 서울 종로구 부암동 환기미술관에서 30주기 추모전이 막 열린 수화 김환기(1913∼1974)도 바로 그런 예술가다.

회고전은 먼저 1963년 도미(渡美) 이전 그림이 지금 전시 중(11월 14일까지)이고 이어 11월 23일부터 연말까지 마지막 10년의 뉴욕시절 그림이 따로 전시된다. 내가 보기에도 두 번의 분할 전시는 그의 화풍을 보여주는 데 효과적이라고 생각한다.

도미 이전의 수화 그림은 조선백자 항아리가 으뜸 모티브였고, 뉴욕시절은 사각의 점이 빼곡히 들어찬 그림이다. ‘하늘은 둥글고 땅은 모나다(天圓地方)’고 했으니 항아리의 원은 하늘을 그린 것이겠고, 사각의 점은 땅의 의미를 천착(穿鑿)했지 싶다. 내 나라에 살 때는 먼 하늘의 이상을 마음에 두었을 것이고, 사고무친한 이국땅에 살 때는 당장 고향 땅이 그리웠을 것이다.

수화는 잘 알려진 대로 조선백자 대호(大壺)인 달항아리에 대한 사랑이 지극했다. 도공(陶工)의 따뜻한 체온이 느껴진다며 껴안고 사랑했다는데, 속 모르는 사람들이 사랑의 까닭을 짓궂게 캐물으면 “믿음직한 맏며느리 엉덩이를 닮아서”라고 둘러댔다. 달항아리에 대한 사랑이 그런 조형적 육감(肉感) 때문 만이었겠는가.

김환기 작 '자화상'(1957년).

등잔 밑이 어둡다고 조선백자에 먼저 빠져든 사람은 일본사람이었다. 그들이 백자 자체의 아름다움에 빠져들 때 수화는 한 차원 높여 그 아름다움을 그림으로 조형하는 선각(先覺)을 발휘한다. 흙은 보이지 않고 뿌리만 드러낸 노근란(露根蘭)을 즐겨 그린 송(宋)말 정소남(鄭所南)의 변이 바로 수화의 마음이었을 것이다. 몽골 오랑캐에 짓밟힌 탓에 “발붙일 땅이 없다”는 정소남에게는 저항의식이 물씬 풍긴다.

뉴욕시절의 점 시리즈는 몬드리안의 ‘부기우기’ 시리즈를 연상시킨다. 부기우기가 현대 창호(窓戶)를 연상시키듯이 수화의 점묘(點描)는 깊은 밤, 맨해튼의 마천루에서 줄줄이 밖으로 비치는 유리창 불빛이다. 몬드리안이 현대문명의 특징을 직사각형 창틀에서 처음 찾은 사람이라면, 수화는 밤을 잊은 채 빛나는 네모 불빛에서 현대문명의 내막을 읽은 사람이다.

뉴욕시절을 수화와 함께 보냈던 김병기 화백(88)의 관측은 1963년의 상파울루 비엔날레에 함께 참여했던 미국 표현주의 작가 바넷 뉴먼의 선묘(線描)에 감명을 받은 끝에 수화의 점묘가 등장했다고 한다. 역시 그와 지근거리에서 교유했던 조각가 한용진(70)은 수화 아파트 거실의 네모진 통나무 바닥재에서 영감을 얻었다고 말한다. 근원을 따져 들면 오히려 조선 분청사기를 장식하던 인화문(印花紋)을 더 닮았다.

그렇다. 수화가 추구하고자 했던 현대성은 우리 전통문화와 맥이 닿아 있다. 항아리 그림이 전통공예를 바로 미술로 옮긴 경우라면, 점 시리즈는 옛 도자문양에서 현대문명을 읽었지 싶다. 우리 정서에 그렇게 와 닿기 때문에 수화 그림인 것이다.

김형국 서울대 환경대학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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