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신형식/‘구두합의’만으론 안된다

  • 입력 2004년 8월 26일 19시 08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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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외교통상부 차관과 우다웨이(武大偉) 중국 외교부 아시아 담당 부부장이 중국의 고구려사 왜곡 문제에 대해 5개항을 구두로 합의했다. 하지만 ‘구두 양해 사항의 합의’라는 모호한 표현이 앞으로 외교적 정치적 구속력이 있을지 의문이다. 향후 ‘합의 이행’에 대해 불안한 마음이 들게 만든다.

▼‘韓-中 5개항’ 알맹이 빠져▼

형식도 그렇지만 ‘합의사항’의 내용은 더 문제다. 겉으로는 현안을 상호 이해하고 해결에 공동노력하자는 것이지만 과도하게 많은 외교적 수식어로 채워져 있다. 5개항 중에서 2개항은 우리 주장이 반영된 것 같이 보이며, 나머지는 상호주의에 입각해 공동노력하고 협조한다는 내용이다. 하지만 이번에 중국이 우리측 주장을 받아들인 것처럼 보이는 대목도 실은 중국 특유의 대지약우(大智若愚·지혜로운 사람은 어리석어 보인다)라는 틀 속에서 본질을 감추려는 것에 불과한 것 아닌가 의심된다. 이에 대해 가시적 표현을 즐기는 우리는 외형적인 자구 표현 몇 개로 만족하는 것 아닌가 걱정되는 것이다.

구체적 알맹이가 없는 합의는 고구려사 왜곡을 극복하는 데 도움이 될 수 없다. 중국 당국은 외교부 홈페이지에서 한국 고대사의 큰 줄기인 고구려사를 삭제하고 그에 대한 우리측의 시정(복원) 요청을 거부했다. 그러면서 교과서 왜곡에 대해서도 구체적 언급을 하지 않고 사실상 묵살했다. 중앙정부의 획일적 통제가 여전한 중국에 대해 ‘중앙 및 지방정부 차원에서의 고구려사 기술에 대한 한국측 관심의 이해’라는 합의사항은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이다. 중국 동북지방의 학자들이 오히려 중앙정부의 ‘새 역사관’을 적극 추종하고 있다는 점이 사태를 더욱 어렵게 하고 있다. 그들은 고구려사와 발해사를 중국사에 편입시킴으로써 동북3성의 중국 내에서의 위상을 높이려는 정략을 갖고 있다.

중국 국가서열 4위인 자칭린(賈慶林) 정치협상회의(정협) 주석이 26일 방한했다. 정부는 차제에 우리 입장이 보다 강력하게 담긴 내용을 문서로 합의해야 한다. 모호한 외교적 수식어가 아니라 중국 외교부 홈페이지의 수정 요구와 고구려사에 대한 중국측의 왜곡 사실을 구체적으로 적시하는 내용이어야 한다. 이를 관철하기 위해서는 고구려사 왜곡이 계속되면 양국 관계의 손상도 감수할 수 있다는 단호한 자세를 보여 줄 필요가 있다.

‘나’의 입장에서 외국사를 설명할 때 오류와 왜곡이 있게 마련이다. 과거의 중국 역사서도 그랬고, 일본서기 등 일본 문헌도 그랬다. 오늘날의 역사학은 그런 왜곡과 오류를 최소화하고, 역사를 객관화해 나가는 작업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런데 중국은 지금 자기도취적 중화의식으로 국제화시대에 역행하는 낡은 역사패권주의로 가고 있는 것이다.

두 개 이상 국가가 얽혀 있는 역사는 상대국과의 관련 속에서 이해해야 하지 자기측 기록과 해석만을 맹신하고 확대하면 반드시 문제가 생긴다. 중국 정부는 물론이지만 중국 학계도 자신들의 문헌이 갖는 한계와 문제를 비판하고 한국측 연구 성과를 객관적으로 수용하는 자세를 가져야 한다.

▼왜곡 적시한 문서합의 필요▼

우리도 막연히 ‘왜곡 시정’의 목소리를 높이는 것에 그칠 게 아니라, 고구려사를 비롯한 우리 고대사를 외국어로 번역해 중국인의 연구가 갖는 문제점과 오류를 제3국의 관계자들에게 이해시키는 작업에 정부와 학계가 함께 나서야 한다. 그렇게 해서 중국을 국제적으로 고립시키면 중국도 스스로 한계를 느낄 것이다.

우리의 성과를 중국어로 번역해 중국의 고구려사 연구자들이 읽도록 하는 노력도 절실하다. ‘역사 왜곡이다, 아니다’라는 백번의 말싸움보다 번역본 한 권을 선물하는 게 보다 차원 높은 대응이 아니겠는가.

신형식 상명대 특임교수·역사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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