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갈피 속의 오늘]장미의 투사…1919년 로자 룩셈부르크 피살

  • 입력 2004년 1월 14일 18시 32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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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9년 1월 15일. 베를린의 밤은 꽁꽁 얼어붙었다. 러시아 혁명을 유럽에 이식(移植)시키고자 했던 극좌파의 무장봉기가 실패로 돌아간 뒤 매서운 검거선풍이 몰아쳤다.

로자 룩셈부르크는 출감한 지 두 달 만에 다시 체포돼 군용트럭의 화물칸에 내팽개쳐졌다. 사병 한 명이 개머리판으로 그의 머리를 사정없이 내리쳤다. 트럭은 란트베르 운하의 한가운데에 멈춰 섰고 그의 몸뚱이는 물 속으로 내던져진다.

그리고 장미가 만발한 5월 어느 날. 여자의 시신이 운하 위로 떠올랐다. 심하게 부패돼 얼굴조차 알아보기 어려운 모습은 ‘장미’라는 그의 이름 때문에 더욱 참혹했다.

‘피의 로자.’ 그는 강철 같은 삶을 살았다. “그는 혁명의 날카로운 검(劍)이요, 살아있는 불꽃이었다.”(클라라 제트킨)

150㎝의 작은 키에 볼품없는 외모. 다리까지 절었던 폴란드계 유대인. 그는 고교시절부터 프롤레타리아운동에 투신했다.

로자는 마르크스를 극복한 마르크시스트였다. 그의 이론적 성취는 마르크스의 전성기에 비견된다. 로자의 ‘자본축적론’은 마르크스의 ‘자본론’을 뛰어넘어 세계 자본주의의 본질을 꿰뚫어본 명저다.

그는 혁명의 열정이 차갑게 빠져나갈 때면 논쟁의 불을 지폈다. 로자는 독일사민당의 거두(巨頭) 베른슈타인과 저 유명한 ‘수정주의 논쟁’을 벌였고 레닌의 ‘위로부터 준비된 혁명’에 맞섰다.

‘자유로운 영혼’ 로자. 그는 자신의 실존을 껴안은 혁명가였다. 매 순간 삶의 경이 속에 머물고자 했다.

“무덤 속에 누워 있는 것 같다”는 수감생활을 견디면서도 자신의 감방을 찾는 굴뚝새와 개똥지빠귀의 안부를 걱정했다. 새들에게 줄 해바라기 씨앗을 부탁했다. 생활은 곤궁했으나 귀한 손님에게는 캐비아와 샴페인을 대접하는 사치를 부리기도 했다.

우리가 인간으로서의 로자뿐 아니라 혁명가로서의 로자를 신뢰하게 되는 것은 이 같은 모순 때문인지도 모른다.

“인간으로 남고 싶다.” 그것이 그의 간절한 소망이었다.

그러나 혁명의 최전선에서 인간으로 남아있기란 얼마나 어려운가.

이기우기자 keywoo@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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