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의향기]다독가 4명의 독서계획

  • 입력 2004년 1월 9일 17시 38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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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주의 역사 풀어낸 伊단편집부터 음미 ▼

책들은 어느 해건 내가 미처 다 읽을 수 없을 만큼 많이 쏟아져 나오기 때문에 지금 당장 거창한 올해 독서계획을 잡기는 어렵다. 일단 1월에는 지난 연말에 집어 들어 아직 책상 위에 있는 책들을 읽게 될 것 같다.

우주의 역사부터 원자(原子)에 관한 이야기까지 감성적으로 풀어낸 이탈리아 작가 이탈로 칼비노의 단편집 ‘코스미코믹스(Cosmicomics)’가 손에 잡힌다. 그 옆에 있는 영국 작가 윌리엄 백퍼드의 소설 ‘바텍(Vathek)’은 과연 인간이 무엇을 추구하며 사는지, 욕망의 끝은 무엇인지 등에 대한 생각의 촉발제가 돼 준다. 미국의 미디어 비평가인 에릭 알터만의 ‘자유 언론이라고?(What Liberal Media?)’라는 책도 보인다. 업무 관계로 미디어에 많은 관심을 갖고 있던 차에 마침 미디어의 사회적 책임 및 인식에 대한 신간이 나와 집어 들게 됐다.

이런 책을 펴 드는 것은 새로운 세상으로 발을 내딛는 즐거움이지만, 아무래도 격무에 시달리다 보면 몇 시간씩 앉아 책을 읽는 것은 다분히 부담스러운 일이다. 그러다 보니 가방에 책 한 권쯤 가지고 다니는 것이 습관이 됐다. 예상치 않게 생기는 자투리 시간에 가까이 있는 책을 읽다 보면 어느새 마지막 장까지 덮게 된다. 해외 출장길은 모처럼 많은 책을 읽을 수 있는 기회다. 비행기 안에서뿐만 아니라 탑승을 기다리는 동안도 책 읽기에 적당한 정도의 소음이 제공되는 훌륭한 독서시간이다. 가방에 두어 권을 챙겨서 가는 길에 다 읽고, 현지의 지인에게 읽은 책을 줘서 짐을 줄인 후 다시 서너 권가량을 사서 오는 길에 읽곤 한다.

2004년, 아직 알지 못하는 어떤 신간들을 또 만나게 될지 기대된다.

윤송이 SK텔레콤 CI 사업 추진팀장

▼사료 연구위해 일본 초등국어 정독할것 ▼

연예인들에게는 자투리 시간이 많다. 오전에 녹화하고 두어 시간 쉬다가 오후에 연습하고, 잠시 쉬다가 저녁 먹고 라디오 생방송이 있다. 대충 이런 식이다 보니 시간 때우기가 참 애매하다. 그럴 때마다 특별히 할 일이 있는 것도 아니고 화끈하게 놀 수도 없다. 이럴 때 시간 때우는 가장 좋은 방법은 책을 읽는 것이다.

지난해 가을 대학원 석사과정(성균관대 사학과)에서 한국사 공부를 시작한 후로는 주로 전공과 관련된 책들을 많이 읽게 된다. 요즘 가방에 넣고 다니는 책은 지도교수인 서중석 교수의 ‘조봉암과 1950년대’(전 2권), ‘한국 현대 민족운동 연구’(전 2권)이다. 이번 방학 동안 다 읽을 계획이다.

학기가 시작되면 전공서적 이외의 책들을 보기는 어려울 것 같다. 그래서 요즘 역사서를 읽는 짬짬이 평소 읽고 싶었던 책들을 들춰보고 있다. 최근에는 미국의 실천적 지식인인 하워드 진의 ‘달리는 기차 위에 중립은 없다’, 김영명 한림대 정외과 교수의 ‘우리 눈으로 본 세계화와 민족주의’를 읽었다.

다락원의 일본 초등학교 국어 교과서 선집도 올해 주요 독서 목록 중 하나다. 전공 영역이 근대사여서 일본어로 된 사료를 보기 위해 인터넷으로 일본어를 공부하고 있다. 최근 ‘1학년 교과서선’을 막 끝냈는데 올해 안으로 ‘4학년 교과서선’까지 끝내고 다음 단계로 넘어갈 계획을 세워두었다.

정재환(43·방송인·한글문화연대 부대표)

▼생물학-디지털 미디어 분야 넘나들 생각 ▼

책 읽고 글 쓰는 일이 업(業)이기는 하지만, 전공과 관련된 서적에 책읽기가 국한되는 경우가 많다. 그러다 보니 ‘읽어야 할 책’이 아니라 ‘좋아서 읽는 책’은 사놓고도 읽지 못하는 일들이 벌어지곤 한다. 올해 많은 시간을 내기는 쉽지 않겠지만, 생물학과 미디어론에 대해서는 나름의 문화적 교양을 쌓아가고 싶다.

생물학의 발전과 더불어 우리는 인간과 생명에 대한 새로운 이해에 도달할 것이며 생명공학이 가져올 변화 속에서 살아가게 될 것이다. 작년에는 ‘핀치의 부리’ ‘붉은 여왕’ ‘21세기 지의 도전’ 등을 곁에 두었고, 최근에는 물리학자 정재승씨의 강력한 추천으로 ‘DNA:생명의 비밀’을 읽었다. 스티븐 제이 굴드의 ‘인간에 대한 오해’를 시작으로, 수준에 맞는 생물학 관련 서적들을 찾아서 읽을 생각이다.

디지털 미디어는 현대인의 존재론적인 기반이다. 관심을 가지고 있는 저자는 프랑스 철학자 피에르 레비이다. 국내에 번역된 ‘집단지성’ ‘누스페어’ ‘지능의 테크놀로지’ ‘디지털 시대의 가상현실’ 등을 읽어나가는 독서계획이 성공적으로 완수된다면, 감상문 한 편을 쓸 수 있지 않을까.

책을 읽으며 떠올리는 이미지는 매화와 재즈이다. 매화의 정신적 높이와 재즈의 자유로움에 대한 갈망 때문일까. 이어령이 편집한 ‘매화’와 에릭 홉스봄의 ‘저항과 반역 그리고 재즈’가 서가에서 손짓을 하고 있다.

김동식 문학평론가

▼역사-과학으로 관심넓혀 한국미래 사색 ▼

여느 해처럼 올해도 특정 분야에 제한 받지 않고 폭 넓은 분야에 걸친 책 읽기를 계속하고 싶다. 독서는 생각을 다듬고, 삶에 대한 열정과 의욕을 주고, 글쓰기의 모티브와 재료를 제공해 주기 때문이다.

올해 특히 시간을 더 배분하고 싶은 분야는 역사다. 역사와 관련해서 올 한 해 동안 2권 정도의 신간을 내놓을 계획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이를 준비해 가는 과정에서 동서양의 전반적인 역사와 아울러 경제사에 대한 기초를 다지는 계기로 삼고 싶다.

또 다른 분야로는 과학기술에 대한 이해를 높이고 싶다. 과학기술의 발전에 대한 세밀한 부분까지 이해할 필요는 없겠지만 과학의 대중화를 위해 준비된 책들을 다시 한번 읽는 기회를 갖고 싶다. 과학에 대한 이해는 사물이나 현상을 새로운 각도로 이해시켜 주는 장점이 있을 뿐만 아니라 지적 호기심을 자극하고 시계(視界)와 안목을 확장하는데도 큰 도움을 준다.

우리나라의 형편은 올해도 크게 나아질 것 같지 않다. 중장기적으로 보면 하향 추세를 기록할 것으로 보인다. 그런 만큼 지난 2년 동안 잠시 제쳐 두었던 한국 경제 문제의 해결 방안에 대한 내용을 국제질서 속에서 이해하는 독서를 포괄적으로 해 보고 싶은 욕심을 갖고 있다.

공병호 공병호경영연구소장

정보 탐색과 취합, 재가공이 중시되는 ‘신교양’의 시대일수록 개인의 지적 좌표를 정립하기 위한 고전적 독서의 중요성은 강조된다. 보후슬라프 마르티누의 오페라 ‘줄리에타’의 공연 장면.

동아일보 자료사진

▼동서고금 독서가들의 책읽기 습관 ▼

독일 역사학자 테오도르 몸젠이 마차에서 독서삼매에 빠져 있었다. 그는 곁에서 시끄럽게 우는 아이를 꾸짖을 요량으로 이름을 물었다. 아이가 외쳤다. “아빠, 저는 당신의 아들 하인리히라니까요.” 1903년 1월 26일 몸젠은 촛대를 들고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 책장 꼭대기에 있는 책을 읽고 있었다. 머리에 불이 옮아 붙었지만 알아채지 못했다. 불을 껐을 때는 그의 머리카락이 다 타버린 다음이었다. 몸과 마음이 온전히 책과 하나 되는 경지였던 셈이다.

단재 신채호는 1928년 겨울 중국 뤼순 감옥에서 면회 온 어느 기자에게 말했다. “음식은 걱정 없어요. 다만 책이나 좀 있으면 하는데….”

단재는 H G 웰즈의 ‘세계문화사’, 백호 윤휴의 문집 ‘윤백호집’, ‘에스페란토 문전’ 등을 차입해줄 것을 부탁했다. 책 읽을 장소 탓을 하는 사람들이 부끄러워할 만하다. ‘책읽기 가장 좋은 곳은 침상, 말안장, 화장실이다. 책 읽고자 하는 뜻이 진실하다면 장소는 문제될 게 없다.’ 송나라 구양수(歐陽修)의 말이다.

책 읽을 시간은 또 어떤가? 세계에서 가장 바쁜 사람일 듯한 빌 게이츠는 “잠들기 전 잠깐의 시간이라도 매일 책을 읽으려 노력한다. 특히 주말이나 휴일에는 서너 시간 정도 책이든 잡지든 반드시 읽는다”고 말한다.

시대를 거슬러 올라가면 전쟁터에까지 괴테의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을 지니고 다니며 거듭 읽었다는 나폴레옹이 있다. 뜻이 있는 곳에 길도 있고 책 읽을 시간도 있다.

읽은 책의 서지사항만이라도 정리해두는 습관을 길러보는 건 어떨까? 미국의 남성 인기듀엣인 ‘사이먼 앤드 가펑클’의 멤버인 독서광 아트 가펑클의 예가 있다. 그의 홈페이지(artgarfunkel.com/library/library.htm)에는 그가 1968년부터 최근까지 읽은 책이 연월순으로 정리돼 있다. 2002년을 보면 19권의 책을 읽은 것으로 돼 있다. 적다면 적지만 만만치 않은 책들이 있다. 플루타르코스의 고전이 있는가 하면 놈 촘스키의 저서도 있고 버나드 루이스의 역사서도 있다.

영국 총리 윈스턴 처칠은 비교적 단기간의 집중적이고 체계적인 독서로 큰 효과를 거두었다. 사관학교를 졸업하고 1896년 제4경기병 연대 소속으로 인도에 간 그는 역사, 사상, 경제, 정치 분야의 책들을 체계적으로 읽어나갔다. 학창시절 공부에서 두각을 나타내지 못했던 그는 남보다 뒤처졌다는 생각에 촌음을 아꼈고, 국제정세와 정치 경제의 현실을 이해하는 데 도움 되는 책들에 집중했다. 이때 독파한 에드워드 기번의 역사서는 훗날 영국 국민을 통합시킨 명연설의 바탕이 됐다.

지식정보의 투입(input) 못지않게 산출(output)도 중요하다. 일본의 저명한 한학자 오야나기 시게타(小柳司氣太·1870∼1940)는 ‘책을 산다, 읽는다, 쓴다’는 걸 신조로 삼았다. 그는 책을 구입하면 반드시 읽었고, 읽고 나면 반드시 그 책의 주제에 관한 글을 썼다. 그 정도는 아니더라도 읽은 책에 관해 이야기하고 글도 써보면 독서의 효험이 배가될 것이다.

계획을 세워 장소에 구애받지 말고 가능한 시간을 최대한 확보해 독서삼매에 빠지고, 읽은 것을 정리해두거나 글이나 말로 내보내는 것. 독서에 왕도(王道)가 있다면 바로 이런 것이 아닐지.표정훈 출판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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