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산다 안산다"다짐했건만…방문판매에 흔들리는 주부

  • 입력 2003년 11월 20일 18시 03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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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대 주부 A씨는 최근 방문판매원에게 유아용 학습전집을 구입하면서 교육에 꼭 필요해 투자하는 것인지, 충동적으로 사는 것인지 판단이 서지 않았다. 판매원의 말처럼 투자일 수도 있고 판매원의 말에 솔깃해 충동 구매한 것일 수도 있다. 중요한 것은 ‘판매원의 말’이 있었다는 것이고 A씨가 ‘구매했다’는 사실이다.

방문판매원들은 각종 설득전략으로 무장한 채 소비의 주도권을 쥔 주부에게 다가간다. 그런데 여기서 의문이 생긴다. 실제로 주부(여성)가 남편(남성)에 비해 방문판매원의 말에 잘 넘어가는 것일까. A씨 대신 A씨 남편이 살림을 도맡고 있었다면 결과는 달라졌을까.

# 설득에 약한 자여, 그대의 이름은 여자이니라

의학적으로 근거가 있다. 정신과 전문의 정찬호 박사(마음누리 신경정신과 원장)는 “뇌의 구조상 남성은 감정을 조절하는 부분이 오른쪽 뇌에 ‘구획’ 지어져 있지만 여성은 뇌 전반에 분포돼 있다”고 설명했다. 남성은 감정적으로 상대방의 말에 동의할 경우에도 이성적 판단은 따로 하게 되지만 여성은 감정에 따라 이성이 움직이는 경우가 많다.

서울대 의대 서유헌 교수(약리학)는 “여성이 남성에 비해 감성에 관련된 작용을 하는 우뇌가 발달했다”면서 “여성들이 분위기에 약한 것은 이 때문”이라고 말했다. 따라서 얼굴을 자주 대하는 ‘단골 판매원’의 설득에 이성적 판단으로 대처하기 어렵다.

사실 주부들이 방문판매로 물건을 많이 사는 이유는 그들이 남편에 비해 방문판매원에게 많이 노출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정 박사는 “면담 결과 주부들은 혼자 집을 지킬 때 외로움을 느낀다”고 말했다. 자연히 악의가 없어 보이는 외부인의 방문에 호의적이고 이들과의 대화는 구매로 이어지기 쉽다.

# 우리가 들인 공은 어떻고

누구라도 쉽게 지갑을 열지는 않는다. 우선 판매원들은 주부들이 문을 열어야 설득전략이건 뭐건 사용해 볼 것 아니냐고 말한다.

정수기판매 3년차인 오모씨(36)는 “화장실이 급하다고 하거나 물을 달라고 하면 주부들은 마음이 약해져 문을 연다”고 귀띔했다.

방문판매 경력 13년차인 ㈜한국프뢰벨 오후덕 이사는 “우선 세 번 정도 가정을 방문해 마음을 터놓은 뒤에야 판매 이야기를 꺼낼 수 있다”고 말한다. 판매원들은 한 집을 방문하면 적어도 한두 시간은 주부와 함께 보내기 때문에 하루에 방문할 수 있는 가정은 많아야 다섯 집이다. 오 이사의 경우 판매로 연결된 것은 열 집 중 세 집 정도. 30번을 방문해 물품 3개를 팔 수 있었다.

아모레 판매여왕 박소재 지부장은 “고객 500명의 목소리를 모두 기억하고 있다”며 “전화목소리를 기억해 주는 것은 그만큼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일”이라고 털어놨다.

대화의 분위기를 이끌어 가는 노하우 역시 필요하다. 사진이 많이 걸린 집은 추억을 주제로 이야기를 꺼내고 화려한 인테리어를 한 집에서는 현실적인 화제가 먹힌다.

오 이사는 “가정을 방문하면 집이든 아이든 우선 좋은 점이 무엇인지 살펴본 뒤 칭찬으로 말을 시작한다”고 말한다. 단순한 것 같지만 효과는 크다.

# 거부할 수 없는 호감의 법칙

베스트셀러 ‘설득의 심리학’의 저자 로버트 치알디니는 “우리는 우리를 칭찬하는 말이 진실이라고 믿는 경향이 있으며 명백한 사탕발림일지라도 그러한 말을 하는 사람들을 좋아한다”고 말했다.

더 나아가 정신과 전문의 양창순 박사(대인관계 클리닉 원장)는 “칭찬을 듣는 쪽은 무의식적으로 칭찬에 대한 부담감을 느끼게 되는데 이런 부담이 구매로 이어질 가능성이 높다”고 설명했다.

그렇다면 어떻게 호감의 법칙에 대항할 것인가. 치알디니씨는 “당신이 잘못된 결정을 내릴 가능성이 가장 높을 때는 우리에게 어떠한 요청을 하는 사람에 대한 감정과 그의 요청에 대한 감정이 혼재할 때”라고 지적했다.

“설득전문가(방문판매원)와 그의 요청을 분리시켜, 그의 요청에 대한 고려에만 의존하여 의사 결정을 내려야 한다.”

한국소비자보호원 백승실 생활문화팀장 역시 냉정을 찾을 시간을 벌어 놓으라고 권한다. “마음에 드는 제품이라도 우선 구매를 보류하고 방문판매자의 연락처를 받아둔 뒤 시중 제품과 비교해 보고 산다.”

주성원기자 swon@donga.com

▼방문판매 말말말▼

△백문(百聞)이 불여일용(不如一用). 일단 제품을 써 보게 한다.(송형배·웅진코웨이개발 본부장)

△절대 물건을 팔려고 하지 말라. 자산관리를 해줘 믿음을 쌓는다.(정태웅·대한생명 서대문영업소 팀장)

△미운 고객 떡 하나 더 준다. 화장품에 부정적 의견을 내놓는 고객에게 고급 샘플을 안겨준다.(김경희·태평양 은평구지부장)

▼방어전략 말말말▼

△‘딩동딩동’ 하기에 문 열어 줬지요. 파출부라고 했어요. ‘아닌 것 같다’기에 “맞아요” 하면서 문 닫았지요.(김혜은·서울 용산구 이촌동)

△벨 누르면 없는 척 가만히 있어요. 문 두드리면 “모든 게 다 있습니다” 하고 답해요.(김주경·경기 수원시 팔달구)

△다 들어요. 그리고 “아저씨는 친절하고 물건도 좋은데 한가지 모르시는 게 있어요.제가 돈이 없어요없다는 걸” 하고 말해요. (서옥경·서울 양천구 목동)

박형준기자 loveso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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