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지서 만난 삼국유사]견훤이 머무른 곳…김제 금산사

  • 입력 2003년 11월 20일 16시 4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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깊은 가을 산사(山寺)를 찾아가는 일은 호젓하고도 아찔하다.

초록이 바랜 자리마다 깊은 한숨을 들이쉰 듯한 가을 잎들이 달려 있지만, 어느덧 그것은 붉은 함성이 되어 계곡을 울려 나간다. 삶의 쓸쓸한 비경(秘境)이 어디에 숨어 있다 뛰쳐나올지 모를 것 같다.

김제 금산사(金山寺) 가는 길도 마찬가지다.

호남고속도로 금산사 톨게이트에서 금산사까지 차로 20여분 남짓, 편도 1차로의 좁은 길에 군데군데 남은 오랜 가로수 행렬이 나타나, 먼저 우리의 콧등을 시큰거리게 한다.

전북 정읍시 이평면 장내리에 있는 전봉준이 살았던 집이다. 작은 솥 2개가 걸린 좁은 부엌이 딸린 초라한 초가집인데, 요즘은 주택가에 둘러싸여 있다.

고속도로는 말할 것도 없거니와, 국도마저 이제 4차로 아니면 명함도 못 내밀게 자꾸만 넓혀지는 와중에 이런 소박한 길을 만난다는 것 자체가 경이요 기쁨이다.

이 길도 언젠가는 파헤쳐질 것이니, 그 전에 한번이라도 더 봐두는 게 남는 일일지도 모르겠다.

아니나 다를까, 금산사 바로 입구에서부터 휑하게 뚫린 4차로가 나타난다. 넓은 주차장과 즐비한 식당은 여지없는 우리네 관광지 모습 그대로다.

그러나 곧 금산사로 오르는 평평한 길로 접어들면 조금은 아쉬운 마음을 달랠 수 있다. 이 절 안으로 한 발짝만 들어서면 번잡한 세상을 벗어난 느낌을 주기에 충분하기 때문이다. 더욱이 콘크리트 포장의 길옆에는 들꽃을 심은 오솔길이 나란히 함께 있어 정겨움을 더해 준다.

산중에 자리 잡은 다른 사찰과 달리 금산사는 한눈에 보기에도 넉넉히 너른 터를 가지고 있다.

사실 지금 빈 터로만 남아있는 자리마다 절집들이 가득 차 있었을 것인데, 백제 법왕 때 처음 만들어지고 통일신라 경덕왕 때 크게 중수된 다음, 오랜 세월 동안 스러지고 세워지기를 되풀이했기에 이제는 옛 모습을 상상하기가 쉽지 않다.

그것이 못내 섭섭하기야 하지만 그러나 미륵전(彌勒殿) 하나가 금산사를 찾는 전부라 해도 딱히 안타까울 것 없다.

우리나라에서 하나뿐인 3층 불전에다, 글자 하나가 어린아이만 한 현판의 글씨는 굳세고도 품이 있고 여유롭다.

그 안의 미륵장륙존상은 본존의 높이가 12m나 된다. 17세기 초에 다시 만들어지고 20세기 초에 손을 보았다지만, 본디 모습은 신라 때의 그것에서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이만 한 높이이니 3층의 불전이 필요했으리라.

미륵전 옆의 송대(松臺)는 또 얼마나 아늑한지. 2단으로 된 넓은 단 위에 석종(石鐘)이 놓여 있고, 바로 앞으로 5층탑이 마치 호위라도 하듯 서 있다.

금산사에 들를 때마다 우리는 비운의 영웅 견훤(甄萱)을 먼저 떠올린다. 한때는 그의 손으로 중창되기도 한 이곳이 아들들에게 묶여와서 감금되는 장소로 바뀔 줄 어찌 알았으랴.

견훤은 경상도 상주 출신이라 하는데, 굳이 전라도 땅에 와서 백제의 후예임을 내세워 나라를 세웠다. 왜였을까?

삼국유사는 견훤 집안의 뿌리가 광주임을 알려준다. 광주 북촌에 사는 한 여인에게 밤마다 기이한 사내가 찾아온다. 부모는 그가 잠든 사이 실을 바늘에 꿰어 옷에 꽂아 놓으라 한다. 다음날 실을 따라 찾아가 보니 큰 지렁이의 허리에 바늘이 꽂혀 있었다. 그들 사이에 낳은 아들이 견훤이다.

솔직히 말하자면 광주에 살았던 견훤의 어머니는 그다지 지체가 높지 못한 떠꺼머리 총각과 눈이 맞은 것이다. 덜컥 아이까지 갖게 되자, 여자의 집에서는 흉악한 소문이 퍼지는 것을 막기 위해 두 사람에게 한 재산 떼어 주고 먼 곳으로 보내고 만다. 거기가 경상도 상주였으리라.

장성한 견훤은 먼 훗날 제 부모의 고향으로 돌아와 나라를 세웠다. 스물 여덟 살의 혈기방장한 나이였다.

그러나 한때 왕건(王建)을 능가하는 강력한 세력을 형성했던 그도, 자식들과의 불화로 모든 공력을 수포로 돌렸으니, 세상의 이치가 예나 이제나 다르지 않다.

그는 이 절에 갇혀 있다가 자기를 지키는 병사들에게 술을 먹여 취하게 한 다음 도망치고, 라이벌이었던 왕건에게 달려가 구차한 목숨을 이어간다.그뿐만 아니다.본디 견훤은 아버지 아자개(阿慈介)와도 싸웠던 사람이다. 3대간의 불화의 끝은 그러니 말하지 않아도 자명하지 않을까.

그런 견훤의 말년을 일연은 삼국유사에 ‘완산요(完山謠)’라 불리는 노래를 실어 실감나게 그린다. ‘가엾은 완산 아이가/아비를 잃고 눈물 흘리네.’

금산사 단풍은 저절로 익어만 가는데, 잊혀진 역사를 떠올리자니 붉거나 노란 색들이 그냥 그렇게만 보이지 않았다.

글=고운기 동국대 연구교수 poetko@hanmail.net

:촬영노트:지금이 금산사 미륵전이나 유적들의 사진을 찍기에 딱 좋을 때다.

단풍이 거의 져서 관광객도 좀처럼 보기 어렵고, 대학수학능력시험이 끝나서 기도하는 사람들도 별로 없다. 그나마 눈에 띄는 것은 절 마당 한 쪽에 있는 감나무에 겨우 남은 까치밥 정도다. 스님들은 동안거에 들어가서 바깥마당은 한가하고 고요하다.

금산사에 들어서면 웅장하게 서있는 미륵전의 모습을 바로 사진에 담고 싶겠지만 잠시만 기다리자.

사진을 찍기 전에 우선 그 안에 들어가서 천장을 뚫고 솟아오를 듯 서 있는 미륵삼존불을 봐야 한다. 그런 다음 경내를 한바퀴 돌고 다시 미륵전을 보면 더 좋은 사진을 찍을 수 있다.

미륵전이 서쪽으로 향해 있어서 오후가 좋다. 단 미륵전 안에서는 사진 촬영이 금지되어 있다.

양 진 다큐멘터리 사진작가 tophoto@korea.com

▼'여행지서 만난 삼국유사' 금산사 주변엔…▼

전북 김제는 만경강과 동진강을 경계로 그 안에 드넓은 김제만경평야를 가지고 있다. 이 강과 평야야 말로 우리 근세사와 고락을 같이한 역사의 현장 그 자체다.

이 곳은 또 한반도 이남에서 지평선을 볼 수 있는 곳이다. 이만한 들이기에 벽골제 같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되고 큰 저수지가 생기기도 했겠다. 벽골제 비와 제방을 볼 수 있다.

이 평야의 서쪽 끝 바닷가에는 망해사(望海寺)가 있는데, 삼국유사에 나오는 처용설화의 무대인 망해사와는 다른 곳이다. 처용설화에 나오는 울산 망해사의 장관이 일출이라면, 진봉면 심포의 이 망해사는 해안의 절경과 함께 일몰이 한 폭의 그림이다.

한편 전선포에는 일제시대 군항이 설치돼 있었다고 하는데 지금은 흔적을 찾기 쉽지 않고, 아름다운 해안선이 활처럼 구부러져 있을 뿐이다.

자동차로 해안도로를 달리면서 천일염을 제조하는 염전을 구경하는 것도 권할 만하다. 드넓은 소금밭에서 소금을 만드는 장면은 교육적으로도 좋을 듯하다. 성덕면의 성덕염전은 전북의 주요 소금 생산지 가운데 하나이다.

만경평야의 남쪽으로는 정읍으로 이어지고, 동진강 가의 신태인읍에서 만석보 터를, 이평면에서 전봉준 고가를 찾아가 볼 수 있다. 여기를 기점으로 동학농민운동의 다양한 유적지를 볼 수 있음은 물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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