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갈피 속의 오늘]1854년 오스카 와일드 출생

  • 입력 2003년 10월 15일 22시 1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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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스로 사회주의자를 공언했고, 동성애자임을 넌지시 비쳤으며, 빅토리아 시대의 예술과 문화를 한껏 조롱했던 오스카 와일드.

1854년 10월 16일, 아일랜드 더블린에서 태어나 프랑스 파리의 골방에서 쓸쓸히 죽어간 그는 자신의 운명을 예감하고 있었던 듯 이런 잠언(箴言)을 남겼다. ‘아름다운 육체를 위해서는 쾌락이 있지만, 아름다운 영혼을 위해서는 고통이 있다.’

와일드가 첫 시집을 출간한 1881년부터 동성애 혐의로 투옥되던 1895년까지 런던의 문화계는 이 옥스퍼드 출신의 무법자 때문에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

무릎에 걸친 반바지, 실크 스타킹, 기발한 모자, 단춧구멍에 꽂은 꽃…. 빅토리아 사회는 그의 댄디즘과 데카당스를 비웃었다. ‘모든 예술은 부도덕하다’는 그의 탐미주의는 “육욕주의적 유파”로 치부됐다. 그러나 그들이 처음부터 이 한없이 나른하고 나르시시즘에 빠진 예술가를 불온(不穩)하게 본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와일드의 ‘예술을 위한 예술’은 점차 사회주의로 옮겨갔고 특유의 독설을 뱉어내기 시작했다. “자선은 부도덕할 뿐만 아니라 불공평하다. 왜 가난한 자들이 부자의 식탁에서 떨어진 빵 부스러기에 감사해야 한단 말인가. 그들도 식탁에 앉아야 한다.”

그는 빅토리아 사회의 인내를 시험하고 있었다.

1890년대 초반은 영국의 지배계급이 동요하던 시기였다. 그들은 자신들의 헤게모니가 생각보다 덜 안전함을 깨달았고 와일드의 말과 행동에서 ‘체제에 대한 위협’을 보았다.

1893년. 그는 마침내 동성애 혐의로 기소된다. 사회의 계급적 토대와 성적 규범에 도전한 한 인간에 대한 심판이 시작된 것이다.

“유혹에서 벗어나는 유일한 길은 그것에 굴복하는 것이다”라는 말을 남겼던 와일드.

그러나 그의 ‘성적 일탈’은 시대에 맞섰던 예술혼과 자유정신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그를 일그러진 한 예술가의 초상으로 그려내고 있다. 그는 자신의 말에 너무 솔직했던 것일까.

이기우기자 keywoo@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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