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요프리즘]서병훈/냉소주의를 경계한다

  • 입력 2003년 9월 23일 18시 19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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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문에 가끔 글을 쓰다 보니 주변 사람들이 적지 않게 걱정을 해 준다. 그렇게 심한 말을 해도 뒤탈이 없느냐는 것이다. 지난 글을 다시 읽어 보면 그런 질문을 받을 만하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그러나 권력 쪽으로부터 괴롭힘을 당한 적은 한번도 없다.

몇 해 전인가, 청와대에서 일하는 선배가 우연한 자리에서 “어떻게 그리 가슴 아픈 말을 하느냐”고 한 정도가 고작이었다.

호랑이 담배 피우던 시절의 이야기 같지만, 70년대 상황은 판이했다. 당시 대학에 다니면서 대학신문을 만들었는데, 그 어려움은 모두가 아는 그대로다.

▼우여곡절 속에도 역사는 발전 ▼

‘역사는 창조적 파괴의 연속’이라는 말 한마디 때문에 신문을 압수당했고, 그 칼럼을 쓴 친구는 그날로 신문사에서 쫓겨나고 말았다. 그때 또래 대학생들은 ‘과연 역사는 발전하는 것인가’라는 화두를 붙들고 씨름했다.

절망적인 정치 상황이었지만 역사의 큰 흐름에 기대를 걸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러면서도 사필귀정(事必歸正)이라는 말에 확신을 가지지는 못했다.

세월이 웬만큼 지나 하고 싶은 말 마음대로 하면서 살고 있다. 오히려 자유에 따른 책임을 스스로 의식할 정도가 됐다. 그러나 최근 우리 사회에 이런저런 어려움이 닥치면서 ‘역사의 발전’을 둘러싼 해묵은 의문이 되살아나고 있다. 암울한 전망이 쏟아져 나오면서 ‘역시 우리는 안 되는구나’ 하는 자조(自嘲)가 급속히 퍼져 나가고 있다.

‘역사란 무엇인가’라는 책을 다시 펴본 것은 이런 이유에서다. 저자인 영국 역사가 에드워드 카는 ‘어떤 식으로든 낙관주의를 표명하는 것이 어리석은 일처럼 보이는 시대’를 살았다. 그는 특히 한때 ‘잘 나가던’ 엘리트 집단을 중심으로 비관과 회의주의가 만연하는 것을 참지 못했다.

역사가 모든 사람에게 똑같은 모습으로 다가가는 것은 아니다. 퇴보로 보이는 것이 다른 사람에게는 진보일 수 있다. 역사가 일직선으로 발전하는 것도 아니다. 우여곡절을 거치지만 전체적으로는 발전한다. 그래서 카는 “그 어느 것에서도 의미를 찾지 못하는 냉소주의자보다는 다소 공허해 보일지라도 낙관주의자에게 박수를 보내고 싶다”고 했다.

이런 진단에서 위안을 얻고 싶은 시점에 우리는 살고 있다. 재난을 예언하는 사람에게는 모든 것이 재난으로 보이는 법이다. 미국의 인권운동가 마틴 루터 킹은 “냉담이라는 사치에 탐닉하거나 소극주의라는 진정제에 의존하기에는 현재가 너무 절박하다”고 했다. 그러면서 그는 “나에게는 꿈이 있다(I have a dream)”고 외쳤다.

꿈을 꾸지 않는 자에게는 미래가 없다. 냉정하게 우리를 되돌아보자. 그러나 가슴은 뜨거워야 한다. 세상은 낙관주의자의 몫이기 때문이다.

따지고 보면 우리는 지금 과거의 성공, 그것도 ‘절반의 성공’에 발목이 잡혀 있는 셈이다. ‘한강의 기적’을 가능하게 했던 압축 성장의 신화는 하루빨리 잊어야 한다. 공부를 해 봐서 알지만 10등 정도로 성적을 올리기는 그리 어렵지 않다. 그러나 우등생이 되려면 그야말로 혁명적인 변화가 있어야 한다. 외연적 성장에서 내포적 성장으로, 더 쉽게 말해 중진국에서 선진국으로 발돋움하기란 결코 쉽지 않다. 민주주의와 경제성장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잡은 나라가 이 지구상에 몇이나 되는가.

▼ 거품빼고 환상버리고 차근차근 ▼

다들 어렵다고 하지만, 그것은 생각하기 나름이다. 우리는 이 순간 재도약을 위한 숨고르기를 하고 있을 뿐이다.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분명한 것은 한 번 더 높이 뛰기 위해서는 몸을 한껏 움츠려야 한다는 사실이다. 무엇보다 우리 삶에서 거품을 빼야 한다. 턱없는 환상을 버려야 한다. 우리는 어느 면으로 보나 중진국이다. 이만큼 올라선 것도 감사한 일이다. 그렇게 생각해야 우리 수준에 맞는 처방을 찾을 수 있다. 급할수록 돌아가라는 말은 언제나 진리다.

우리가 지금 겪고 있는 어려움은 역사발전을 위한 피할 수 없는 과정이다. 역사에 공짜가 어디 있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 ‘눈물의 빵’을 먹어 본 사람은 쉽게 좌절하지 못한다. 비관주의자들은 가라.

서병훈 숭실대 교수·정치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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