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광장/홍찬식칼럼]우리 안의 민족사랑

  • 입력 2003년 9월 5일 17시 58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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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세기 프랑스 농민들은 평생 자기 집으로부터 8km 이상을 벗어나지 못하고 일생을 마쳤다고 한다. 17세기 후반 영국인 가운데 런던에 한 번이라도 가본 적이 있는 사람은 7명 중 한 명에 불과했다. 불과 몇 백 년 전만 해도 인간의 행동 반경이 극히 제한되어 있었음을 보여준다. 당시 사람들은 같은 나라에 속해 있어도 소속감은 그리 강하지 않았으며 민족이라는 개념도 모호했다. 이들에게 훨씬 중요했던 것은 자신이 속한 마을공동체였을 것이다. 유럽에서 근대적 의미의 민족주의가 등장한 것은 프랑스혁명 이후로 기록된다.

▼갈수록 식어가는 사회적 온정 ▼

우리가 민족의식에 눈을 뜬 것은 조선조 말 열강의 침략을 받은 뒤의 일이다. 이전까지는 프랑스와 영국 농민의 예처럼 뚜렷한 민족 개념은 없었을 것이다. 이후 일본의 식민 지배를 받으면서 저항적 민족주의가 깊이 형성된다. 이처럼 민족의식은 연원이 생각보다 오래되지 않지만 나라를 잃었던 시절 국가의 공백을 훌륭히 메워주는 역할을 했다.

아직도 우리 내부에서 민족이라는 단어는 감히 거스를 수 없는 ‘신성함’ 그 자체다. 민족주의가 갖고 있는 폐쇄성이나 다른 집단에 대한 배타성, ‘우리’라는 이름 아래 묵인되는 불합리하고 억압적인 관행 등 부정적 측면들은 상대적으로 가려지고 묻혀져 있다. 그래서 민족주의에 대한 비판도 만만치 않다. 민족주의가 정치적으로 이용되는 것을 경계해야 하며 편협한 민족주의에서 벗어나야 선진사회로 진입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민족주의의 가치는 유효하다. 세계화와 무한경쟁 시대에 국가 성장의 에너지로 작동할 수 있기 때문이다. 남북한 문제도 마찬가지다. 북한에 대한 냉철한 시각과 아울러 민족 역량을 극대화하기 위한 장기적인 안목도 가져야 한다. 하지만 북한과의 ‘민족 공조’를 내세우기에 앞서 살펴보아야 할 게 있다. 바로 ‘우리 안의 민족 사랑’이다. 우리 내부가 얼마나 따뜻한 형제애를 발휘하고 있느냐의 문제다.

얼마 전 대구 유니버시아드에서 북한 선수단과 응원단에 대한 관심은 대단했다. 오죽하면 ‘유니버시아드가 남북한 잔치냐’는 말까지 나왔을까. 대통령이 나서 북한에 유감을 표시하는 등 상상할 수 없었던 일들이 대회 와중에 벌어졌다. 이런 광경들을 지켜보면서 자연스럽게 오버랩된 것은 우리 내부의 모습이었다.

우리 사회가 지연 혈연 학연으로 조각조각 단절되어 서로 벽을 치고 있는 것은 ‘같은 민족 맞나’ 하는 그야말로 근본적인 회의를 갖게 하지만 워낙 뿌리 깊은 문제이니 일단 접어두기로 하자. 가장 상징적인 것이 탈북자의 국내 적응 문제가 아닐 수 없다. 우리가 같은 민족으로서 북한을 포용한다면 당장 급한 손길이 필요한 사람들은 탈북자이다.

얼마 전 TV 다큐멘터리 프로그램은 탈북자들이 국내에서 최하층 생활을 하면서 허드렛일 하나를 얻기 위해 사방팔방 뛰어다니는 현실을 보여주고 있다. 탈북자라는 사실을 밝히면 남한 고용주들은 이내 외면하고 말았다. 이들을 감싸 안는 사회적 지원과는 별도로 정부가 적극적으로 이들의 정착을 도와줘야 한다. 최근에는 오히려 외국에서 더 관심을 보이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빈곤상태에 놓인 계층이 전국적으로 500만명을 넘고 있으나 사회적 온정이 메말라 가는 것은 남한 사회 내부의 ‘민족 사랑’이 갈수록 식어가고 있다는 증거다. 북한 지원에는 발 빠른 정부도 이들의 자활 대책은 제대로 내놓지 못하고 있다. 최근 발표된 정부의 신빈곤층 대책은 예산의 뒷받침이 되지 못한 ‘속빈 강정’이라는 비판을 받았다. 한국인의 뇌리에 깊이 각인되어 있는 ‘단일민족’은 한낱 이론에 불과한 것인가.

▼내부의 균열부터 치료해야 ▼

추석을 맞아 민족의 대이동이 시작된다. 마음만은 항상 넉넉하던 추석 분위기가 예전 같지 않다. 경기 침체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정부는 반성의 자세로 살펴보아야 한다. 정부가 ‘코드 맞추기’와 ‘편 가르기’를 확대 재생산하며 내부 균열과 갈등을 부추기면서도 대외적으로 ‘민족 화해’를 강조하는 것은 공허하기 짝이 없다는 사실을. 밖으로 민족을 외치기에 앞서 내부를 먼저 들여다볼 일이다.

홍찬식 논설위원 chansik@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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