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나 작품에 점점 몰입할수록 이런 선입견은 사라진다. 피카소는 소년, 노인, 그리스 신화 주인공의 다양한 얼굴을 빌려 화면에 등장하는데, 거기에는 삶과 여인을 진정으로 ‘사랑’했던 거장의 깊은 내면이 숨어 있기 때문이다.
그가 많은 여자들과 사귄 것은 사실이지만, 그들을 단순히 욕망을 해소하는 도구로 이용한 것은 아니었음이 작품에 나타나 있다. 작품들마다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피카소의 시선에서 그의 여성관을 읽을 수 있다.
여인과 함께 누워 있거나 여인을 안고 벌거벗은 남자의 시선은 여인의 벗은 몸에 가 있지 않다. 조각품이나 풍경을 쳐다보는 남녀의 눈은 마주보는 것이 아니라 한 곳을 같이 응시한다. 나부(裸婦)를 세워 놓고 작업을 할 때도 작가의 시선은 캔버스나 조각할 대상에 가 있다. 이는 피카소가 여성을 비하하거나 대상화하지 않고 평등한 존재로 인정하고 있었다는 암시다. 그는 또 잠자는 여인을 바라보는 남자의 모습을 다양한 모습으로 표현했는데 여인을 내려다보는 남자의 시선에는 탐심(貪心)이 없고 하나같이 사랑과 연민이 가득하다.
미술평론가 이주헌씨에 따르면 인물화나 역사화가 회화의 꽃인 서양화에서 화가와 모델은 힘겨운 창조의 산고(産故)를 같이하는 동지다. 피카소의 화면에 등장한 여성 모델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항상 변화를 추구하고 호기심에 가득 찼던 그에게 동지가 한 둘이 아니었음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그런 점에서 이번 전시회의 감상포인트는 수많은 판화 속에 나타난 피카소의 내면 세계다. 피카소는 단지 야한 내용의 판화를 즐겨 만든 것이 아니라 생의 절정을 맞았을 때나 죽음을 앞둔 노년에도 끊임없이 샘솟는 열정으로 예술혼을 불태운 거장이었음을 확인하게 된다.
전시회에 나온 205점은 스페인 방카하 재단이 갖고 있는 ‘볼라르 판화집’과 ‘347 판화집’에서 뽑은 걸작들이다. 피카소는 중년에 접어들자 마치 일기를 쓰듯 판화 제작에 몰입했다. 볼라르 판화집은 화상(畵商)이었던 볼라르가 40대 후반에서 50대로 넘어가는 피카소의 1930∼1936년 판화를 모은 것이고 ‘347 판화집’은 1968년, 피카소가 87세 때 오랜 친구가 죽고 난 뒤 7개월 동안 제작한 판화 347점을 모은 것이다.
볼라르 판화집에 나타난 중년의 피카소는 기량에서나 표현의 자유에 있어 ‘절정기’에 있음을 보여준다. 시각적이 아니라 촉각적이라는 느낌이 들 정도로 농익은 선(線)들은 아름답고 탄력적이면서도 품위가 있다. 화면의 주인공들은 당당하면서도 평온하다. 피카소는 그리스 신화에 등장하는 반인반수(伴人伴獸)의 모습을 빌려 제도나 권위에 복종하지 않고 본능과 감성에 충실한 예술가의 모습을 그대로 보여준다.
이러한 솔직함은 노년기에 제작한 ‘347 판화’에서도 드러난다. 그는 서커스장이나 사창가, 화실을 배경으로 늙고 노쇠했지만 아직도 열정과 욕구를 가진 자신의 모습을 '훔쳐보는 방관자'로 드러낸다. 욕망은 있으나 행동하지 못하는 자신에 대한 얼마나 솔직하고 관조적인 표현인가.
서울대 김영나 교수(미술사학)는 “거의 의도적이라 볼 수 있는 혼란스러운 도상(圖上)과 뛰어난 착상, 풍부한 상상력, 짖궂은 유머와 익살, 대담한 기법으로 평가되는 피카소의 판화들은 그가 경험한 사랑과 욕망, 예술가적 열정과 혼을 여과없이 보여준다”고 말했다. 02-771-2381∼2
허문명기자 angelhuh@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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