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중회화, 실경산수, 역사적 의미가 내재된 독도 시리즈, 그 조형 작업의 완결편이라 할 원형상 시리즈 등 그의 작업 세계는 넓고 깊다. 수묵, 채색, 극사실에서 추상 표현주의에 이르기까지 섭렵하지 않은 조형 세계가 없고 그 작업적 전환점에서 그가 내보인 조형들은 우리 현대 미술의 발화점이자 기폭제가 되었다.
작품 세계에 대해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던 중 참고 있던 질문을 던졌다. “따님이 돌아 가신 후 삶과 그림에 어떤 변화가 있었나요?”
인터뷰하기 전, 그에 대한 숱한 자료들을 찾아 읽다가, 그가 ‘참척(慘慽)의 경험 이후 가톨릭에 귀의했다’는 한 대목을 보고 이 거장(巨匠)의 내면이 궁금했었기 때문이다.
동서고금을 넘나드는 해박한 지식과 탄탄한 화론(畵論)으로 종횡무진하던 그는 난데없이 무례한 질문을 피할 수도 있었건만, 표정이나 목소리에 변화없이 예의, 울림이 큰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유일하게 내 뒤를 이을 아이였는데…. 내가 잘못한거 아닌가 그런 생각이 들어요. 나는 ‘노력하면 안될 게 없다’는 정신으로 살았어요. 아이들에겐 그런 내가 파쇼적인 아버지일 수도 있었겠지…. 하긴, 제자들도 내가 무서워 가슴이 두근거린다고 하니, 하하.” 그는 소년처럼 웃었다.
“난, 평생 보이지 않는 것은 믿지 않는 사람이었소. 이성과 논리만을 믿었지요. 너무 자만하며 산거지요. 딸 아이 투병을 지켜보면서 많은 것을 배웠어요. 생명이 얼마나 감사한 지도 깨달았고. 아이를 보내면서 마침내, 내 사유가 미치지 못한 세계가 있음을 인정하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내 안에 있던 분노와 이기심, 시기심이 씻은 듯 사라지더라구요.”
그는 서울대 미대와 대학원을 나와 약관에 국전 추천 작가가 되어 일찍이 화명(畵名)을 떨쳤다. 모교의 교수로 35년(강사생활 12년 포함)째 강단에 서왔고, 현재 서울대 박물관장으로 재직하며 국립대 박물관의 면모를 일신시켰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동양 화단의 정상, 현대 한국 회화의 정점에 닿아 있는 작가인 그에게 새삼 구구한 수사를 달 필요는 없을 정도다.
그래서 많은 이들이 그를 강하고 뜨거운 사나이로 기억하지만, 그의 내면은 약하고 섬세했다. 평범이나 대충이란 것은 없이 ‘절대 몰입’의 삶을 살아 왔기에 쉰이 넘은 나이에 맞닥친 ‘참척’이라는 삶의 고통 앞에 철저히 무릎꿇었다.
‘항복’의 방법 역시 그 다웠다. 초월이나 허무대신 현실 속에 자신을 더 몰아친 것이다. 그러다 꼭 1년 전 심근경색으로 사경을 헤냈다. 그림작업에, 학교일, 화단과 성당 일까지 무려 스무개 안팎의 직책을 맡아 바삐 오가다 쓰러졌던 것.
‘스물 다섯시간을 사는 사나이’로 불릴 정도로 열심히 사는 그에게 ‘때로 자책이나 허무감이 몰려오지 않느냐’고 묻자 이렇게 말했다.
“그럴 시간이 없지요. 그때 일(투병)도 건강에 대해 너무 과신했다는 것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었지요. 병원에 4분만 늦게 도착했어도 죽었다고 하대요. 죽으면 또 죽는 거지 뭐. 그저 살아 있는 순간 순간, 최선을 다하는 거지요.”
오전 11시에 시작한 인터뷰는 오후 3시가 임박해서야 끝났다. 그의 말은 열정적이었고 쉼이 없었고 게다가 재미있었다.
그는 자신의 열정을 자신이 아닌, 온전히 남을 위해 쓰는 사람이었다. 자신의 에너지를 필요로 하는 사람과 장소가 있다면, 기꺼이 내 던졌다.
“지식이나 돈은 베풀기 위해 갖는 겁니다. 우리는 쌓기만 가르치지 쓰는 것은 안 가르쳐요. 예술의 목적도 결국 인간입니다.” 02-734-0458
허문명기자 angelhuh@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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