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장-가족 함께하는 시간 하루 고작 78분

  • 입력 2003년 5월 8일 18시 19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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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장인 A씨(39)는 얼마 전 휴일에 “○○가 미워”라며 매달리는 유치원생 큰아이를 성가시다며 밀어내고는 TV로 눈길을 돌렸다. ○○가 누구인지도 모르는 판에 코맹맹이 소리를 하는 큰아이의 투정을 받아주기에는 너무 피곤했기 때문이다.

A씨처럼 쉬는 날에도 아이들과 놀아주지 않는 게 한국 직장인 아빠들의 현실이다.

한국보건사회연구원(보사연)이 10세 이상 가족 구성원 4만2000여명을 대상으로 2001년 분석한 ‘한국인의 생활시간 배분실태와 효율적 활용방안에 관한 연구’ 보고서에 따르면 한 사람이 일요일에 미취학 아이들을 씻기거나 함께 놀아주는 시간은 평균 16분에 불과한 것으로 나타났다.

이러한 조사 결과는 한국인의 생활이 기본적인 생계유지와 교육 등 사회적 영역에 집중되고 있으며 가족과 함께 하는 생활이 거의 존재하지 않음을 보여준다.

사실 A씨는 평일이면 눈뜨자마자 출근 준비에 바쁘다. 아침밥을 먹는 둥 마는 둥 하고 집을 나설 때면 아이 둘은 보통 잠을 자고 있다. 맞벌이를 하는 아내 역시 아이들 음식 만들랴, 출근 준비하랴 전쟁을 치르기는 마찬가지다.

A씨의 귀가시간은 오후 9시를 훌쩍 넘기는 경우가 태반이다. 집에 돌아와 신문을 뒤적거리며 TV 뉴스를 보면 아이들은 어느새 잠이 들어 있다. 조금 일찍 들어온 아내는 아이들 뒤치다꺼리 하느라 이미 파김치가 됐다. A씨 부부의 눈꺼풀은 이내 감겨버린다.

이러다보니 부부가 상대방에게 신경을 써주는 것은 꿈도 꿀 수 없다. 이 보고서는 한국인이 배우자의 일을 도와주는 등 상대방을 보살피는 데 쓰는 시간이 평일과 토요일에는 각 2분씩, 시간여유가 있는 일요일에는 그나마 1분으로 줄어든다고 밝혔다.

반면 잡지나 TV를 보는 평균 시간은 남자가 2시간29분, 여자는 2시간18분에 이른다. 이중 TV 시청시간은 남자 2시간6분, 여자 2시간4분을 차지한다. 일요일에는 TV 시청시간이 3시간을 넘는다.

보고서에 따르면 한국인들이 하루 평균 1시간18분을 가족과 함께 보내지만 실상 이 중 40분은 가족과의 식사시간이다. A씨가 그렇듯 식사시간은 묵묵히 밥을 먹거나 아이들을 거둬 먹이느라 어수선하게 보내는 게 보통이다. 그렇다고 A씨가 유독 별난 사람은 아니다.

“가족을 먹여 살리느라 최선을 다하지만 성실한 직장인과 좋은 가장이 동시에 된다는 게 한국에서는 참 어려운 것 같다”는 것이 A씨의 변명 아닌 변명이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가족 구성원간에 정서적 유대를 쌓아가는 노력은 찾아보기 힘들다.

보사연의 또 다른 연구는 가족의 여가 휴식기능이 일반가정의 경우 4점 만점에 평균 1.85점으로 중간 수준에도 미치지 못하는 것으로 평가했다. 총 평가 대상인 7개 기능 중 최하위 점수였다.

보사연 김승권(金勝權) 연구위원은 “가정이 가족구성원간에 대화를 하거나 갈등을 푸는 공간이 되지 못하고 있다”며 “취업으로 ‘경제력’을 확보한 여성들이 늘어나면서 못마땅한 가정생활을 정리하려는 ‘가족 해체’ 조짐도 많이 나타난다”고 말했다.

김 연구위원은 또 “선진국에는 퇴근 후 저녁시간을 가족과 함께 보내는 문화가 정착돼 있다”며 “사회의 기본단위인 가족을 건강하게 유지하기 위해서는 직장과 가정, 학교와 가정이 양립할 수 있도록 법적 제도적 지원체계를 마련하는 게 시급하다”고 지적했다.

이 진기자 leej@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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