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강]수면과 성장호르몬의 비밀

  • 입력 2003년 3월 9일 18시 25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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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찍 자야지.” “싫어. 텔레비전 볼 거야.”

주부 이모씨(31·서울 영등포구 당산동)는 매일 밤마다 여섯 살 된 아이와 전쟁 아닌 전쟁을 치른다. 이씨는 일찍 잠자리에 들어야 성장호르몬(Human Growth Hormone·HGH)이 분비된다는 얘기에 신경을 쓴다. 그러나 휙휙 화면이 바뀌는 TV에 푹 빠진 아이는 요지부동이다. 아이가 잠자리에 드는 시간은 오후 11시반경. 이씨는 아이가 제대로 자라지 못할까 걱정이다.

아이들의 성장에 큰 영향을 미치는 HGH가 오후 10시부터 다음날 오전 2시 사이에만 분비된다는 얘기는 사실과 다르다. HGH는 깊은 잠에 빠져 있으면 언제든지 분비될 뿐 아니라 소량이지만 깨어 있을 때도 분비된다.

그렇다면 굳이 아이를 채근하면서까지 일찍 재울 필요가 있는 것일까. 아무 때나 잠을 재워도 푹 재우기만 하면 되는 게 아닐까. 의학자들은 그렇지 않다고 말한다. 일찍 자야 좋다는 얘기다.

▽유해환경과 성장장애=늦은 밤 방송되는 인기 TV 드라마가 아이들의 잠을 빼앗고 있다. 인터넷, 게임 등에 빠진 아이들도 적지 않다. 부모가 늦게 귀가하는 바람에 아이들의 취침시간도 덩달아 늦어지기도 한다. 이른바 ‘수면 유해환경’들이다.

수면 유해환경은 결국 수면 부족으로 이어져 성인이 됐을 때 심각한 문제로 나타난다. 미국 국립보건연구원(NIH) 산하 수면장애연구소의 칼 헌트 소장은 최근 “잠이 모자란 아이들은 집중력이 부족하고 화를 잘 내며 쉽게 실망하거나 감정을 잘 통제하지 못한다”고 밝혔다. 헌트 소장은 수면 부족의 원인으로 과외활동, 숙제, TV, 인터넷, 휴대전화, e메일 등을 지적했다.

NIH 산하 국립심장-폐-혈액연구소의 클로드 랑팡 소장도 아이들의 나쁜 수면습관은 성인이 됐을 때 심장병, 호흡기 질환, 비만 등을 유발할 수 있다고 경고했다. 하버드대 의대에서도 수면이 부족할 경우 기억능력이 떨어지는 것은 물론 단순한 악기 연주와 운동, 기술 습득 능력에 장애를 보일 수 있다는 연구결과를 최근 미국 국립과학원 회보와 ‘뉴런(Neuron)’지에 보고한 바 있다.

아이들은 잠을 충분히 자지 못한 다음날에도 ‘쌩쌩’한 경우가 많다. 뇌와 근육이 아직 성숙되지 않아 피로감을 느끼지 못하기 때문이다. 초등학교 저학년일수록 수업시간에 조는 아이들이 적은 이유도 여기에 있다. 수면장애는 서서히 나타난다. 따라서 아이들이 산만하면 일단 수면부족을 의심해 봐야 한다.

▽일찍 자야 건강하다=의학자들은 개인차를 인정하면서도 일반적으로 신생아는 하루에 15∼20시간, 한 살이 되면 12∼13시간, 2∼3세면 11∼12시간을 자도록 생체리듬이 정해져 있다고 말한다. 수면시간은 점차 줄어 12∼14세 정도가 되면 성인과 비슷한 하루 8시간 정도를 자게 된다.

그러나 취침시간이 늦어지면 이런 리듬 자체가 깨질 수 있다. 자정 무렵 잠이 들어 오전 8시에 일어났을 때 외형상 수면시간은 8시간이지만 중간에 햇빛이 숙면을 방해하기 때문에 잠의 질이 떨어지고 실제 수면시간도 5∼6시간에 불과하다. 또 취침 시간대가 자꾸 밀려 새벽 취침으로 굳어지는 ‘수면위상지연증후군’이 나타나기도 한다. 이 경우 HGH의 분비량은 눈에 띄게 줄어든다.

또 성인과 달리 수면 주기가 밤에 집중돼 있는 5∼10세 아이들은 일반적으로 생체리듬이 오후 9∼10시경 졸리게 돼 있다. 따라서 늦어도 오후 10시 이전에 잠자리에 들어 ‘푹’ 자는 게 좋다.

▽제때 자는 버릇 만들기=오후 10시 이전에 아이를 방에 들여보내 스스로 방을 정돈하도록 시키는 게 좋다. ‘이제 잠을 잘 시간’이란 자각을 갖도록 하기 위함이다.

아이가 TV를 더 보겠다고 떼를 써도 단호하게 잘라야 한다. 컴퓨터를 마루로 옮기는 등 아이가 밤에 혼자 놀 수 있는 오락기구는 모두 방에서 퇴출시키는 게 좋다.

방에 불을 켠 채로 자면 숙면에 방해가 되므로 원칙적으로는 좋지 않다.

그러나 아이가 혼자 자는 것을 지나치게 두려워할 경우 정서장애를 유발할 수 있으므로 무조건 불을 끄기보다는 손전등 밝기(15럭스) 정도의 미등을 밝혀주도록 한다.

이 경우 수면 방해를 최소화하기 위해 미등은 천장보다는 아이의 눈 높이 아래에 있는 탁자 위나 밑에 설치하도록 한다. 미등은 아이가 중간에 잠이 깼을 때 어두움 때문에 두려워하는 경우가 아니면 잠든 직후 바로 꺼 주는 게 좋다.

부모가 늦게 귀가할 경우엔 아이에게 전화를 걸어 잠을 권하도록 한다. 아이들이 “혹시 부모가 안 오는 게 아닐까”라는 불안감에 휩싸이지 않도록 하기 위함이다. 아이들은 부모의 목소리를 들음으로써 심리적 안정을 얻게 된다.

이밖에 커튼은 햇볕이 잘 투과되지 않는 것으로 하고 외부로부터 소음이 차단되는 방음창을 설치하는 것도 한 방법이다. 방의 습도는 60%, 온도는 22도 정도로 유지하는 게 좋다.

(도움말=성균관대 의대 삼성서울병원 수면장애클리닉 홍승봉 교수, 고려대 의대 안산병원 수면호흡장애센터 신철 교수, 서울시립은평병원 수면클리닉 김석주 과장)

▼수면장애 왜 일어날까▼

최근 수면 유해환경이 늘면서 아이들도 코골이, 수면 무호흡증, 이갈이 등 각종 수면장애에 시달리고 있다.

수면 무호흡증은 주로 성인들 사이에 나타나는 수면 장애. 그러나 최근 들어 14세 미만의 아이들 사이에 급속하게 확산되고 있다. 패스트푸드 등 서구 식단의 영향으로 아이들의 체형이 비만형으로 바뀌면서 기도가 좁아지고 편도가 비대해졌기 때문이다.

고려대 의대 안산병원 수면호흡장애센터 신철 교수는 “전체 아이의 2∼3%가 코골이와 수면 무호흡증에 걸려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고 말했다. 신 교수는 이어 “이런 질환으로 수면클리닉을 찾는 아이들은 매달 10여명에 육박하고 있으며 갈수록 숫자가 늘고 있다”고 덧붙였다.

성인의 경우 잠을 자는 도중 코를 골다가 ‘컥’하고 숨이 막혀 10초 정도 숨을 쉬지 않다가 ‘후’하고 숨을 몰아쉬는 현상이 1시간에 5회 이상 나타나면 수면 무호흡증으로 진단한다. 그러나 아이들은 이런 현상이 1시간에 1, 2회만 나타나도 수면 무호흡증에 걸린 것으로 봐야 한다.

수면 무호흡증에 걸렸을 때 성인은 병원에서 수면다원검사를 받는 게 좋지만 아이들은 식단을 야채 중심으로 바꾸고 운동을 꾸준히 시키는 등 생활습관을 고치는 게 더 중요하다. 아이들의 0.5∼1% 정도는 잘 때 이를 가는 것으로 추정된다. 대부분 성장과정에서 나타나는 자연적인 현상인 경우가 많지만 치아가 고르지 못하거나 정신적인 스트레스를 많이 받아 이를 가는 경우도 적지 않다. 가령 아이가 옷에 소변을 봤을 경우 엄마가 심하게 꾸짖으면 잠을 자면서 이를 갈 확률이 높아진다.

이갈이가 심하면 전문의를 찾아 원인을 먼저 알아내는 게 중요하다. 치아 배열이 심하게 둘쭉날쭉 하면 치아 교정을 해야 하지만 스트레스가 원인일 경우 안정을 시켜 줘야 한다. 그래도 이를 계속 갈면 심리치료를 받는 게 낫다.

김상훈기자 corekim@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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