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열규 교수의 웃음의 인생학]<19>˝열 푼에 닷 푼은 외상˝

  • 입력 2002년 12월 16일 17시 44분


조선조 이래로 전국에서 구두쇠 고을로 이름 난 데가 있었으니 해주 개성 수원 그리고 진주 등이다. 모두 제일급의 상업도시여서 장의 규모가 남달랐다. 그래서 구두쇠와 자린고비를 양산한 걸까.

그러니 뜻하지 않게 ‘구두쇠 겨루기’가 이들 고을 사이에서 벌어지기도 한 모양인데, 개성과 해주 사이의 아옹다옹이 특히 유명하다. 서로 가깝다 보니 그랬을까.

해주 구두쇠가 아들 장가를 보낸다고 청첩을 보내 왔다. 개성 구두쇠는 머리를 짰다.

‘현금 열 푼 준다. 그러나 닷 푼은 현금, 나머지는 외상.’

이렇게 적힌 희한한 작은 종이쪽지를 다섯 푼 돈과 함께 인편으로 보냈다.

“괘씸한 노랭이 어디 두고 보자.”

해주 구두쇠가 이를 갈았다. 몇 해 뒤 복수할 기회가 왔다. 개성 노랭이가 딸 시집을 보낸답시고 청첩을 보냈다.

‘내가 열 푼 부조를 하는데 닷 푼은 네 놈 외상 진 걸로 탕감하고 남는 닷 푼은 내가 외상을 진다.’

해주 구두쇠는 인편으로 말만 전했다. 개성 구두쇠가 가만있을 수가 없다. 홧김에 무슨 짓 한다고 맨발로 해주까지 달려갔다. 해주 구두쇠의 집안에 들어서서는 불문곡직 창호지마다 살피고 다니는 게 아닌가.

“암, 그럼 그럴 테지!”

빙그레 웃더니 가지고 온 가위로 창호지 뚫린 곳에 덧발라진 작은 종이쪽을 도려내었다.

그러면서 해주 구두쇠에게 말했다. “돈만 준다는 거지 이 종이까지는 아니야. 알았어?”

의기양양하게 대문을 나서는 개성 구두쇠를 해주 구두쇠가 잡았다. 종이를 낚아채더니 칼로 종이 뒤에 말라붙은 밥풀을 싹싹 긁어내었다.

“이 구두쇠야! 요 풀은 내 거야!”

가만 개성 구두쇠는 뭘 얻은 것일까? 싸움은 사뭇 일방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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