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극]철학의 눈으로 본 연극 ‘신곡 3부작’

  • 입력 2002년 11월 6일 17시 57분


‘신곡’-지옥-거꾸로 매달린 영혼들./사진제공 LG아트센타
‘신곡’-지옥-거꾸로 매달린 영혼들./사진제공 LG아트센타
사랑에 상처입고 삶에 좌절한 이탈리아 시인 단테 알리기에리(1265∼1321년)는 낯선 세계로 여행을 떠났다. 지옥과 연옥과 천국으로의 여행. ‘신곡(神曲)’은 그의 영혼이 떠났던 여행의 기록이다.

삶의 의미를 찾는데는 ‘삶이 아닌 것’과의 대비만큼 유용한 방법이 없다. 죽음을 떠올릴 만큼 삶이 고통스러운 이들은 함께 따라가 볼 만한 여정이다.

막상 따라가 보면 그 세계는 낯설지 않다. 그것은 플라톤의 이데아처럼 사라진 빛, 잊혀진 빛의 세계다. 지상의 삶은 그 빛의 그림자이고 그 그림자의 ‘어둠’에 대한 치열한 ‘반성’을 통해 우리는 그 빛의 세계로 인도된다.

다행히 단테의 난해한 언어를 형상화해 내는 천재적 재능을 가진 ‘가이드’까지 나타났다. 7일 막을 내리는 연극 ‘신곡-지옥, 연옥과 천국’ 3부작을 가지고 온 슬로베니아 출신의 연출자 토마스 판두르.

▽지옥〓“나의 이름은 발칸이다”.

판두르 감독의 ‘지옥’은 잔인한 내전으로 얼룩진 그의 고향 발칸에서 시작된다. “민중의 안위와 나라의 명예를 구실삼아 폭력에 폭력으로 맞서는 도시”.

판두르는 “믿음과 은총과 동정심이 없는” 바로 그 도시에서 지옥을 발견했다.

단테가 층층이 나눠 놓은 지옥은 판두르의 무대에서 세 층으로 구성된다. 맨 밑바닥에 있는 지옥에는 잔인과 야만과 폭력을 상징하는 물과 어둠의 검은 그림자가 가득하다. 그 아수라에서 울려퍼지는 고란 브레고비치의 음악은 관객의 심장과 함께 박동하며 신의 이름을 부른다.

‘주여, 나를 자유케 하소서.’

▽연옥〓“김영삼, 김민기, 정몽준, 강수연, 이건희, 유승준….”

검은 빛에서 흰 빛으로 갈아입은 연옥의 영혼들은 무대 위에서 객석의 관객들을 내려다보면서 애처로워하며 우리에게 낯설지 않는 이런 이름을 부른다, ‘이제 지옥에서 그만 헤매고 연옥으로 올라오라’는 듯이.

이 연옥의 흰 빛이 너울거리는 강에서 악(惡)을 씻어내는 정화(淨化) 의식이 진행된다.

“고통은 그릇된 사고의 결과에요. 고통은 사물을 판단하는 데서 비롯되지요.”

‘판단’뿐만 아니다. 눈을 꿰매어 그릇된 판단의 원인이 되는 ‘감각’을 막자, 비로소 빛이 보이기 시작한다.

지옥에서 연옥까지 단테의 영혼을 인도했던 로마의 시인 베르길리우스의 임무는 여기서 끝난다. 이제 “자유로운 자기 의지가 영혼을 일깨우는” 단테를 천국으로 안내할 수 있는 것은 ‘이성’을 상징했던 베르길리우스가 아니라 ‘사랑’을 상징하는 ‘베아트리체’다.

▽천국〓‘EXIT’

판두르 감독은 천국에 비상구(EXIT)를 만들었다. 천국이 천국일 수 있는 이유는 ‘자유’가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자유의 힘은 ‘이성’이 아닌 ‘사랑’과 ‘진실’에서 온다.

“매 순간 어디서나, 사랑을 간직하며 거짓과 맞설 것”을 함께 다짐하는 단테와 베아트리체는 하얀 물 위, 크리스탈 잔들을 통해 투명한 빛과 청량한 음향이 번지는 공간에서 사랑의 파티를 벌인다. 위트와 미소와 관용이 넘치는 파티는 ‘인형극’처럼 순수하고, ‘두 번 태어난 자’가 벌이는 사랑의 잔치는 자연스럽게 지상의 현실로 이어진다.

그러면, 우리의 현재는?

“서울, 연옥, 2002년 11월7일.”

연극 ‘신곡’의 제작진은 서울이 정화를 통해 천국으로 갈 수 있는 연옥이기를 기원했다. 우리의 현실은 발칸과 같은 지옥이 아니라 적어도 ‘천국’의 희망을 간직한 ‘연옥’이어야 한다는 주장이기도 하다. 나도 동의한다. 공연은 7일까지, 오후 7시반 LG아트센터. 2만∼5만원. 02-2005-0114/www.lgart.com

김형찬기자·철학박사 khc@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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