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어 조기교육 폐해 논란 ‘ABCD’ 뚫리면 ‘가나다라’ 막힌다?

  • 입력 2002년 10월 8일 16시 06분


원어민으로부터 영어를 배우고 있는 어린이들.동아일보 자료사진
원어민으로부터 영어를 배우고 있는 어린이들.동아일보 자료사진
《서울의 한 초등학교 3학년생인 A군은 수업 중에도 영어를 섞어 말한다. 학교를 ‘스쿨(school)’, 냉장고를 ‘프리저(freezer)’라고 말하고 낱말 뿐 아니라 문장 자체를 영어로 쓸 때가 잦다. 발음은 거의 미국 원어민 수준이다. 99년부터 2년간 영어를 배울 겸 어머니와 함께 미국 생활을 했다. 귀국해서도 어린이 영어학원에 다니며 감각을 유지했다. 하지만 정작 A군을 괴롭히는 것은 국어를 제대로 구사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동화책에서 ‘그녀’라는 낱말을 여러 번 봤지만 ‘she’를 국어로 옮길 땐 ‘이’‘저’라는 말을 붙여 ‘이녀는’ ‘저녀는’ 이라고 하기도 있다.》

영어 조기교육열이 확산되면서 취학 전후 어린이들에게 어떤 방법으로 영어를 배우게 할 것인가가 관심의 초점이 되고 있다. 해외 연수, 학원 수강, 비디오 시청 등 갖가지 방식으로 영어를 배우고 있지만 국어실력을 쌓아가면서 영어를 우리말처럼 하기는 어렵기 때문. 특히 ‘영어 배우려다 우리 말을 익힐 기회를 잃는 경우’는 우리말로 학습해야 하는 국내 환경에서 어린이에게 학습 의욕을 빼앗거나 창의성 발달에 장애를 초래할 수 있다고 전문가들은 경고한다.

▽아이들은 어떻게 모국어를 배우나〓 지난달 발간된 책 ‘빈 석판’(Blank Slate)의 저자인 MIT대학 언어심리학자 스티븐 핀커는 아기들의 언어습득과정을 연구한 뒤 “인간의 뇌에는 언어를 익히는 프로그램이 입력돼 있다”고 주장해 유명해진 인물. 그는 94년 출간한 ‘언어본능’(The Language Instinct)이란 책에서 “아이들은 이 같은 문법유전자가 존재하는 12살 이전에는 체계적 교육이나 훈련 없이도 어떤 언어건 자연스럽게 습득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서울대 언어학과 이호영 교수도 “인간은 선천적으로 아무런 고통 없이 언어를 배우게 돼 있다”며 “가정에서 자연스레 영어가 오가거나, 영어권 국가에서 생활하는 등 환경만 주어진다면 어린이들은 우리 말과 영어 모두 모국어처럼 익히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영어와 국어 사이〓A군과 유사한 사례는 이미 대부분의 아동심리 전문가들이 한 차례 이상 상담해 보았다고 말하고 있다. 만 3세인 B양의 경우 언니(5)가 공부하는 영어 비디오를 너무 자주 접하게 돼 거의 우리말을 하지 못하는 상태. 올초 이를 알아차린 부모는 B양에게 아동심리상담센터의 치료를 받도록 하고 있다. 만 6세인 C군의 경우 하루 6시간 수업하는 어린이 영어학원에 3년 이상 다니다 보니 영어는 잘 하지만 TV의 어린이 프로그램에 나오는 우리 말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거나, 우리 말을 잊은 것처럼 보일 때가 많다. 만 5세인 D군의 경우 2년반가량 미국 생활을 마치고 지난해말 돌아온 뒤 병원으로부터 ‘언어 장애’와 ‘후천성 유사자폐’ 징후가 있다는 진단을 받았다.

▽말 잘하는 아이는 따로 있다〓다시 핀커 교수의 책들을 살펴보자. 그는 지금 미국에서 화제가 되고 있는 책 ‘빈 석판’에서 “지능이나 성격 등 인생을 좌우하는 많은 요소가 유전자에 의해 결정된다는 사실이 속속 입증되고 있다”며 “인간은 결코 백지로 태어나지 않는다”고 ‘빈 석판’이론을 비판했다. 그동안 아이에게 말을 많이 해주면 말잘하는 아이가 된다는 연구결과에 따라 부모교육이론서들은 부모들에게 ‘수다쟁이가 돼라’고 요구했던 것이 사실. 그러나 언어유전자(재능)도 타고나는 것이라고 주장하는 핀커 교수는 “부모와 아이가 같은 유전자를 갖고 있어 그 유전자가 부모를 수다쟁이로 만들고 그들의 아이를 ‘똑부러지게 말하도록’ 만드는 것인데 ‘수다쟁이 부모 밑에서 자란 아이가 말 잘하는 것’처럼 보일 뿐이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유전자가 모든 것을 결정하므로 가만히 있으라는 얘기는 물론 아니다. 핀커교수는 “언어입력물이 언어발달에 필요하다”(‘언어본능’)면서 “하지만 단순한 사운드트랙으로는 충분하지 않다”고 경고하고 있다. 예를 들면 정상적으로 들을 수 있는 자녀를 둔 청각장애 부모들은 한때 아이들에게 TV를 많이 보게 하라는 조언을 들었지만, 어떤 경우에도 그 아이들은 영어를 배우지 못했다는 것이다. 이미 그 언어를 알고 있지 않다면, 그 이상하고 반응 없는 TV속의 인물들이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아이가 이해하기 매우 어렵다는 얘기다. 결국 다시 어떤 아이에게 어떤 방법으로 영어를 배우도록 할 것인가하는 문제가 남는다.

▽가르치는 방법에 문제는 없는 걸까〓 부모의 과잉 학습열이나 극단적인 무관심 등이 우선 꼽힌다. 연세대 의대 소아정신과 신의진 교수는 “영어 영재 콘테스트 등에서 우수한 성적을 거둔 형제의 지능지수를 재어 달라는 부탁에 응한 적이 있다”며 “측정 결과 예상 외로 평균보다 훨씬 낮은 수준을 보였다”고 말했다. 신 교수는 “이들 형제는 아주 어렸을 때부터 어머니가 영어 비디오 시청, 작문 테스트 등을 시켜 영어의 주입식 암기는 어느 정도 돼 있었으나 부모도 모르는 사이에 아이들이 스트레스와 불안 증세를 겪어 지능 발달에 장애를 일으킨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그러나 핀커 교수의 주장를 토대로 이들 형제를 보면 영어구사능력과 관계없이 아이들의 지능이 원래 낮은 수준이었을 수 있고 ‘언어입력물’이 적절치 않았을 수도 있다.

한편 B양의 경우 언니와 함께 영어 비디오 등을 보면서 잘 어울려 지내자 어머니가 방치한 게 우리 말 성장이 정지하게 된 가장 큰 이유로 보인다.

▽조기교육, 적기교육〓 전문가들 사이에서도 영어조기교육에 대한 견해가 엇갈린다. 영어조기교육 반대론자들은 만 6세 미만 어린이들에게 우리말 외에 영어까지 가르치는 것은 사고력 발달과 우리말 어휘력 향상 등에 바람직하지 않다고 말한다.

이화여대 발달장애아동센터의 김도연 연구원은 16개월 된 아이에게 유아용 영어 비디오와 오디오를 보여주거나 들려주지 않고 있다. 그는 “만 5세가 되어 두뇌가 충분히 발달한 것으로 보일 때부터 하루 30분 안팎 놀이하듯 영어를 접하는 것이 바람직한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신 교수 역시 “만 6세 미만 어린이에게 영어를 가르치는 것은 위험하다고 본다”고 말했다.

서울 원광아동상담센터 신철희 부원장은 “영어 외에도 내댓 가지 레슨을 함께 받는 과잉 조기 교육의 경우 문제가 발생할 수 있다”며 “창의성 발달을 위해 차라리 아이들이 하루 종일 놀도록 하는 게 바람직하다”고 말했다.

그러나 대체적으로 영어든 다른 조기교육이든 아이들의 능력에 맞게 가르쳐야 한다는 것이 온건한 유아교육 전문가들과 엄마들의 견해다. 영어 교육 프로그램 개발 기업인 이퓨처의 황경호 대표이사는 “조기 영어 교육 자체에 대해 찬반의 이분법적 시각을 갖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며 “영어에 대한 어린이 개개인의 재능과 흥미에 따라 가르치는 것이 중요하다”고 주장했다.

권기태기자 kkt@donga.com

조기영어교육에 대한 전문가 견해

 

신의진 연세대 의대

소아정신과 교수

한학성 경희대 영어학부 교수

이호영 서울대 언어학과 교수

황경호 이퓨처 대표이사

조기영어교육에

적절한 시기

기본적으로 반대. 정 한다면

만 6세 이후부터.

영어로 대화하는 가정 등 학습 부담 없는

‘모국어 환경’이 되면 이를수록 좋다.

태어난 뒤부터 영어에 노출시킬수록

좋다. 단 ‘모국어 환경’이 돼야 한다.

만 5세 이후 부터.

장점

(효과가) 없다.

‘모국어 환경’이 되면 영어를 일찍 익히게 된다.

어려서부터 다원화된

세계관을 갖게 된다.

발음이 좋아진다.

영어 구사가 자유로워진다.

부작용

학습 부담으로 창의성과

정서적 안정 해칠 수 있다.

국어 습득에 어려움을 겪을 수 있다.

영어도 국어도 잘 못해 언어 능력

자체가 뒤떨어질 수 있다.

경우에 따라 발생한다. 재능이 있고

교육방법만 적절하면 발생하지 않는다.

비고

영어 공교육에 따라 영어

공부를 해도 지장 없다.

영어 사교육 붐을 우려. 공교육이 바로 서야 한다.

중학교 때 시작해도 늦지 않다. 노력이

중요하다.

초등학교 고학년 때 뒤처지면 영어

흥미를 잃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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