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장’ 전성시대…너도나도 명함에 “실장” 쓰는 이유도 갖가

  • 입력 2002년 8월 15일 16시 44분


인테리어 디자인 회사 에스아이(si)의 오너 CEO인 ‘실장’ 최연경씨. ‘방’ 꾸미는 일을 천직으로 아는 그는 ‘사장’보다 ‘실장(室長)’이라는 직함이 자기에게 더 적합하다고 생각한다. /전영한기자 scoopjyh@donga.com
인테리어 디자인 회사 에스아이(si)의 오너 CEO인 ‘실장’ 최연경씨. ‘방’ 꾸미는 일을 천직으로 아는 그는 ‘사장’보다 ‘실장(室長)’이라는 직함이 자기에게 더 적합하다고 생각한다. /전영한기자 scoopjyh@donga.com
제스프리는 뉴질랜드 키위의 세계 시장 판매를 맡는 기업이다. 광고 기획일을 하던 김희정씨(33)는 97년 헤드헌팅 회사의 소개로 제스프리 한국지사 창업을 맡았다.

당시 한국지사에서 프로젝트가 생길 때마다 일하던 비정규 직원은 6명이었고 정규 임직원은 그 혼자였다. 지사는 사실상 한 사람이 일하는 ‘원 맨 오피스(one man office)’라 할 수 있었다. 뉴질랜드 본사가 그에게 준 직함은 ‘마켓 매니저 코리아(market manager Korea)’였고, 서류상 그는 한국 법인 대표였다. 그는 한국 직함 문제로 고심하다가 ‘실장(室長)’이라고 정했다. 지사 규모가 작은데다가 사장은 너무 권위적으로 비칠 수 있었다.

그간 김씨는 나이 든 사업 파트너들로부터 “윗분 나오라고 해” “다음 번 나올 땐 사장 모시고 나와” 혹은 “그러면 최종 결재권을 가지고 계신가요?” 라는 말을 듣기도 했다. 눈치 빠른 파트너들은 그를 “사장”이라고 부른다. 그간 한국 내 키위 시장은 급속도로 커졌고 한국 지사는 정규 직원 4명, 비정규 직원 5명 규모로 늘어났다. 하지만 그는 여전히 ‘사장’ 대신 ‘실장’이란 직함을 쓴다.

영화·비디오 마케팅 회사인 메시지 컴퍼니를 운영해온 그의 남편 이경수씨(36)가 6년 이상 ‘실장’ 직함을 써오다가 올해초 ‘사장’으로 바꿨지만 김씨는 개의치 않는다.

“‘실장’이란 말에는 현장 실무를 다루는 느낌이 납니다. 제게는 솔직한 ‘판매 현장의 소리’를 들을 필요가 있거든요. 지사가 훨씬 더 커지기 전까진 ‘실장’으로 남을 생각이에요.”

‘실장’ 직함이 전성기를 맞고 있다. 대기업 부사장부터, 벤처회사 사장, 팀장, 체인점 지점장까지 실제 직급과 상관 없이 ‘실장’ 직함을 즐겨 쓴다. 심지어 과거 ‘전무’ 명함을 내밀던 룸살롱 지배인들까지 ‘실장’임을 자처한다.

원래 ‘실장’이란 말에는 ‘독립된 방에서 가장 윗사람’이란 뜻이 있다. 사장-이사-부장-차장-과장-대리 등의 보편화된 직급 이름들이 ‘조직 내 서열’을 나타낸다면 실장이란 어휘에는 어떤 ‘별도 공간의 최고책임자’란 뜻이 있다. ‘실장’이란 이름은 쓰이기에 따라 탈(脫)권위적인 느낌을 주기도 하고, 힘을 보태는 역할도 한다. 그만큼 뉘앙스가 묘하다.

대기업인 삼성생명의 김현호 부사장은 탈(脫)권위 효과 때문에 실장 직함을 선호한다. 직원들에게 “부사장 대신 실장으로 불러달라”고 주문해오고 있다. 실제 기획관리실장을 맡고 있는 데다 ‘실장’이 부사장보다 훨씬 친근감을 주기 때문이다.

3000여종의 수입 화장품을 취급하는 인터넷 쇼핑몰 플러스원(plus1000.co.kr)의 미디어팀을 맡고 있는 임재숙씨(31)는 사장 허락과 사내 동의를 얻어 ‘실장’ 직함을 쓴다. 임씨는 “실제 직책은 ‘팀장’이 정확하다”며 “하지만 실장에 좀 더 힘이 실리는 것 같아 입사할 때 실장 직함 사용을 요청했다”고 말했다. 미디어팀이 신문 방송 등을 상대하는 대외 업무가 많은데다가 팀원들이 별도 출퇴근 시간대 없이 갖가지 일을 처리하는 사정을 감안해 사장이 팀에 힘을 보태주기 위해 배려했다는 것. 그가 쓰는 실장 개념에 부합하듯 플러스원 미디어팀은 다른 팀과 달리 별도의 ‘방’을 쓰고 있다.

한편 명실공히 ‘사장’이지만 ‘실장’ 직함을 쓰는 경우도 많다. 직원 7명을 둔 인테리어 디자인 회사 ‘에스아이(si)’를 운영하고 있는 최연경씨(36)가 그렇다. 최씨는 “겸손하게 고객을 맞기 위한 것”이라고 말했다.

㈜신발끈여행사, 도서출판 ㈜신발끈 등을 운영하는 장영복씨(37)의 명함에는 ‘대표이사/실장’ 직함이 쓰여있다. 그는 홍익대 경영학과 4학년생이던 91년 호주 등지에서 아르바이트도 하며 영어도 배우는 ‘워킹 홀리데이’ 연수를 아이템으로 삼은 신발끈여행사를 세웠다. “직접 고객과 상담하는 때도 있는 데다 너무 젊은 사람이 사장 명함을 내밀면 회사 규모가 턱없이 작아보일 수 있어” 실장 직함을 써왔단다. 현재 회사 직원은 12명. 사업 파트너들이 골프장 등에서 “장 사장”이라 부르기도 하지만 그는 여전히 ‘실장’이 좋다고 한다. 그의 영문 직함은 ‘이사’‘국장’으로 번역되는 ‘director’다. 장씨는 “프레지던트(president)는 삼성 현대 같은 대기업 사장들한테나 어울리는 게 아니냐”며 손을 내저었다.

실장 직함을 쓰다가 여건상 사장으로 바꾸는 경우도 있다. 영화사 미로비젼의 채희승 사장(28). 연세대 경영학과 4학년생이던 98년 자본금 5000만원에, 직원 5명으로 한국 영화 해외배급사로는 최초인 미로비젼을 창업하면서 1년 남짓 ‘실장’ 직함을 썼다. 당시 그의 부친인 사업가 채태백씨(55)가 명목상 사장을 맡았다. 그러나 사세가 훌쩍 커지고 부친이 영화사에서 손을 떼자 그는 사장 직함을 쓰기로 했다. 마흔을 훨씬 넘긴 스태프가 적지 않은데 이들에게 이사, 부장 직함을 주려면 그가 사장이 돼야 했기 때문이다.

실장이 이처럼 전성시대이다보니 유흥업소에서도 자주 쓰인다. 서울 센추럴시티 호텔 지하의 한 나이트클럽 웨이터를 지냈던 K모씨는 얼마전 P룸살롱 지배인을 맡으면서 내부적으로는 ‘전무’라 부르기로 했지만, 손님들한테는 ‘실장’ 명함을 준다. ‘밤 문화’ 전문웹진인 ‘나가요닷컴’의 목영도 사장은 “대부분 고객이 사장, 이사급이라 여기에 맞추려다 보니 실장이 적합해서 일 것”이라며 “‘룸살롱’의 ‘룸’의 의미에도 맞는 것 아니냐”고 말했다.

삼성경제연구소 이정일 수석연구원은 “실장 직함은 전통적으로 정부 조직과 대기업 조직 등에서 기획조정실, 감사실, 비서실 등 모(母) 조직 전체를 상대로 하거나, 별도로 나와 있는 특별한 조직의 장(長)이 쓰는 것이었다”며 “최근 몇 년간 벤처 창업이 활성화되고, 대규모 조직들도 조직 유연화 작업에 나섬에 따라 실장 직함이 널리 쓰이게 됐다”고 말했다.

그는 “실장 직함은 우리나라와 일본 등지에서 보편화된 것”이라며 “엘리트, 소수정예, 고급스러움, 전문 스태프를 이끌고 있다는 이미지가 담겨있어 앞으로도 널리 쓰일 것”이라고 내다봤다.

권기태기자 kkt@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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