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눈]정옥자/덕수궁 옆에 웬 美대사관?

  • 입력 2002년 8월 4일 18시 12분


덕수궁 옆 주한 미국대사관 및 아파트 신축 공사가 논란의 초점이 되고 있다. 시민단체들은 ‘문화 주권’을 앞세워 저지운동을 벌이고 있고, 미대사관은 강행 의사를 분명히 하고 있다. 이 민감한 사안을 처리해야 할 서울시장은 당선 직후 반대 입장을 표명했다가 한 달여 지난 지금 관련 법규에 따라 판단해야 한다고 태도를 바꿔 비난을 받고 있다.

▼문화주권-자존심의 상징▼

덕수궁은 원래 경운궁(慶運宮), 또는 명례궁(明禮宮)으로 불렸는데 조선왕조의 궁궐 중에서도 유난히 파란만장한 역사를 갖고 있다. 경운궁은 원래 성종의 형인 월산대군의 사저였다. 임진왜란으로 경복궁과 창덕궁이 소실되자 의주로 피란갔다가 돌아온 선조는 바로 이곳을 궁궐로 삼아 정사(政事)를 보았다. 시설이 부족해 주변에 있던 관료들의 집을 수용해 사용했다.

광해군은 창덕궁을 중수하고 경덕궁(뒤에 경희궁으로 이름을 고침)을 창건해 주로 창덕궁과 경덕궁을 사용했다. 후궁 소생이었던 광해군은 자기보다 훨씬 젊은 계모 인목대비를 당시 서궁(西宮)으로 불리던 이곳에 유폐했고 그녀의 소생인 어린 동생 영창대군을 살해했다. 이른바 폐모살제(廢母殺弟)로 불리는 이 사건이 결정적 계기가 되어 광해군은 반정의 대상이 되고 폐위되었다.

반정으로 왕위에 오른 인조는 서궁에 유폐되어 있던 인목대비로부터 옥새를 받기 위해 창덕궁에서 이곳으로 옮겨 왕위에 올랐다. 이후 조선 후기 왕들은 창덕궁과 경희궁을 왕궁으로 사용했고 고종 때에야 폐허로 남아 있던 경복궁을 중건했다. 임진왜란 이후 민생문제에 밀렸던 숙원사업을 이루고 비로소 정궁의 위엄을 되찾았던 것이다.

오래도록 잊혀졌던 경운궁이 역사의 중심 무대로 떠오른 것은 이 땅에 다시 외세의 물결이 거세게 밀려들어왔던 때였다. 1895년 을미사변으로 명성황후가 시해되자 신변의 위험을 느낀 고종이 1896년 러시아대사관으로 피난가는 이른바 ‘아관파천’이 일어났다. 1년 후 고종은 러시아 미국 영국 등 외국 공사관들이 밀집해 있던 경운궁으로 환궁해 계속 머무르니 이곳이 정궁의 역할을 하게 되었다.

이어 1897년 10월 12일 대한제국이 탄생하면서 경운궁은 명실공히 대한제국의 정궁이 되었다. 황제가 제천의식을 갖는 곳으로 상징성을 갖고 있는 원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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