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채와 에어컨 이야기

  • 입력 2002년 7월 18일 14시 53분


18세기 조선시대 선비들이 부채를 낯가리개로 사용하던 모습을 그린 단원 김홍도의 풍속화 '노중상봉(路中相逢)'의 일부. 동아일보 자료사진
18세기 조선시대 선비들이 부채를 낯가리개로 사용하던 모습을 그린 단원 김홍도의 풍속화 '노중상봉(路中相逢)'의 일부. 동아일보 자료사진
한낮에는 30도 안팎의 더위가 땀에 젖게 만드는 요즘이다. 성급한 시민들은 휴가를 내서 산으로 바다로 벌써 피서를 가기 시작했지만 그렇지 못한 사람은 자칫 짜증이 나기 쉽다.

이런 때 우리에겐 고마운 것이 있다. 부채와 에어컨. 접는 부채는 약 1000년전인 11세기 고려 시절에 처음 만들어져 중국을 거쳐 유럽 여러 나라로 퍼져 나갔다는 것이고, 에어컨은 17일로 탄생 100주년을 맞았다고 한다.

부채와 에어컨에 얽힌 이야기로 잠시 더위를 이겨보자.

▼부채 탄생 1000년▼

성하(盛夏)의 계절, 에어컨 선풍기가 넘쳐난다 해도 부채는 역시 필수품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부채는 단순한 필수품 차원을 넘어선다. 부채는 멋스러움을 상징하는 하나의 장식물이다. 부채엔 부채를 만드는 장인의 치열한 땀이 배어있고, 서화가들의 글씨와 그림을 그려넣거나 화사한 장식을 곁들이면 그것은 그대로 하나의 예술품이 된다.

부채는 이처럼 낭만적이다. 여기엔 동서양 예외가 없다.

우리에겐 전통적으로 부채의 8덕목이 전해온다. 그 첫째 덕목은 당연히 '더위를 쫓아주는 덕'. 그리고 '땅에 앉을 때 방석이 되어주는 덕' '햇볕과 비를 막아주는 덕' '파리 모기를 쫓아주는 덕' '저 멀리 방향을 가리켜주는 덕' '여인이 옷 갈아 입을 때 가려주는 덕' '흥겨울 때나 노래 부를 때 장단 맞춰주는 덕' '빚쟁이 만났을 때 얼굴을 가려주는 덕' 등. 부채의 용도를 8덕목으로 정리한 옛사람들의 낭만과 해학이 무릎을 치게 만든다.

▼부채의 8덕목▼

1.더위를 쫓아주는 덕

2.방석이 되어주는 덕

3.햇볕과 비를 막아주는 덕

4.파리 모기를 쫓아주는 덕

5.방향을 가리켜주는 덕

6.옷 갈아 입을 때 가려주는 덕

7.노래 할 때 장단 맞춰주는 덕

8.빚쟁이 만났을 때 얼굴 가려주는 덕

유럽에서 부채는 귀부인의 장식품이자 연애의 필수 도구였다. 특히 17,18세기 접는 부채를 이같은 용도로 즐겨 사용했다. 11세기 고려에서 중국으로 건너간 접는 부채는 16세기 들어 포르투갈인들에 의해 중국에서 유럽으로 전해졌고 이후 스페인 프랑스 이탈리아 등 유럽 전역으로 퍼져나갔다.

17세기부터 유럽 여성들은 부채를 연애 감정을 표현하는 '은밀한 메시지'로 사용했다. 그것은 일종의 '부채 언어'였다. 자신의 연애 감정을 드러내기 어려웠던 여성이 부채를 통해 다양한 감정을 표현했던 것이다. 17세기 런던과 파리에서는 여성에게 부채 언어를 가르치는 아카데미가 만들어지기도 했다. 부채가 만들어낸 다양하고 풍부한 사랑의 언어는 다음과 같다.

'부채를 오른쪽 빰에 댄다=예' '부채를 왼쪽 뺨에 댄다=아니오' '천천히 부채질을 한다=저는 이미 결혼했어요' '오른손으로 부채를 들어 얼굴을 가린다=나를 따라오세요' '왼손으로 부채를 들어 얼굴을 가린다=당신과 친해지고 싶어요' '손가락으로 부채의 가장자리를 따라 움직인다=당신과 이야기하고 싶어요' '왼손으로 부채를 만지작거린다=누군가 우리를 감시하고 있어요' '부채를 접어 상대에게 내민다=저를 사랑하세요?' '부채를 눈 쪽으로 가져간다=미안합니다' '부채를 넓게 편다=기다리세요' '왼손에 부채를 들고 펼친다=와서 얘기 좀 해요' '부채를 머리 뒤로 가져간다=저를 잊지 마세요'.

부끄러운 듯 뜨거운 사랑을 갈구하는 유럽 여성들의 눈빛이 눈에 선하다. 유럽 여성들이 사용했던 사랑의 부채는 지금 '유럽과 동아시아 부채전'이 열리는 서울 용산구 이태원2동 화정박물관에 가면 만날 수 있다(9월29일까지, 02-798-1954, 2287-2990).

이광표기자 kplee@donga.com

▼에어컨 탄생 100주년▼

17일은 미국에서 세계 최초의 에어컨이 탄생한 지 100주년이 되는 날. 이날 폭염 소식을 전하던 한 TV 방송사 앵커는 "에어컨이 없었다면 숨막히는 더위를 도대체 어떻게 이겨내야 했을지 모르겠다"며 이를 발명한 윌리스 하비랜드 캐리어(1876~1950)에게 고마움을 표명했다.

캐리어는 버팔로 제철소에서 주급 10달러를 받고 엔지니어로 일하던 1902년7월13일 온도와 습도 공기순환 등을 모두 통제하는 최초의 에어컨 시스템을 발명했다. 코넬 대학에서 전기 공학 석사학위를 받은 지 1년밖에 안된 25세 때였다.

이 회사의 고객인 뉴욕의 한 인쇄소가 여름철 고온과 습기로 인쇄용지가 변질돼 고민하는 것을 해결해준다는 것이 발명의 동기였다. 그는 뜨거운 스팀을 채운 코일 사이로 공기를 통과시키는 기존의 온방 시스템 원리를 뒤집어 냉매를 채운 코일 사이로 공기를 보내 냉매의 증발열을 이용, 온도를 낮추는 방식을 고안했다.

캐리어는 1915년 동료들과 함께 캐리어 엔지니어링사라는 에어컨 회사를 설립했지만 실제로 에어컨이 보급되기까지는 적지 않은 시간이 걸렸다. 1924년 디트로이트의 허드슨 백화점에 이어 다음해 뉴욕 리볼리 극장에 에어컨이 설치되면서 에어컨의 효능이 널리 알려지게 됐고 이어 미 의회(1928년)와 백악관(1929년)에도 에어컨이 설치됐다.

그러나 30년대 대공황과 2차대전 등으로 인해 미국의 에어컨 대중화는 50년대 이후에 비로소 시작됐다. 미 가정의 에어컨 보급률은 60년대초만 해도 12% 수준이었으나 현재는 80%에 이른다.

과거 로마의 황제들은 설산(雪山)의 눈을 가져다 정원에 놓고 더위를 쫓았다. 또 8세기 바그다드의 권력자들은 이중벽이 있는 방에 얼음과 눈을 쌓은 뒤 시종들에게 부채질을 하게 하는 등 여름철 냉방을 모색한 역사는 오래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에어컨의 등장은 단순히 쾌적한 냉방을 제공하는 수준을 넘어 현대 문명에 큰 변혁을 가져왔다. 오늘날 각종 의약품과 화학약품의 생산, 우주 탐사, 개폐 창문이 없는 유리 건축물, 사막지역 개발, 박물관의 예술품 보관 등은 에어컨이 없이는 생각하기 어렵다.

워싱턴=한기흥특파원 eligius@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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