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박경리의 ´토지´ 독일어 번역한 헬가 피히트

  • 입력 2002년 7월 11일 18시 53분


일민 라운지에 걸려있는 일민 선생 관련 화보를 보며 90년 첫 방한 당시를 회고하는 헬가 피히트씨 [사진=이종승기자]
일민 라운지에 걸려있는 일민 선생 관련 화보를 보며 90년 첫 방한 당시를 회고하는 헬가 피히트씨 [사진=이종승기자]
《“목숨이 붙어있는 한 한국이 낳은 최고의 문학작품인 ‘토지’에 계속 매달릴 겁니다.”

박경리의 대하장편소설 ‘토지’ 독일어 번역작업을 진행중인 헬가 피히트(68) 전 훔볼트대 코리아연구소 소장이 18∼22일 열리는 정신문화연구원 주최 제1회 세계한국학대회에 참가하기 위해 한국을 찾았다.

평양식 억양의 유창한 한국어를 구사하는 피히트씨는 80년대 말까지 동독 정부요인과 김일성의 만남이 있을때마다 통역을 맡기도 했던 구동독 최고의 한국어 통번역자. 이번 세계한국학대회에서는 18일 오후 ‘박경리와 세계문학’을 주제로 주제발표를 한 뒤 22일 독일로 돌아간다.》

“92년 훔볼트대에서의 직책을 사임한 뒤 문학 번역사업에 남은 인생을 쏟기로 마음먹었죠. 박완서 ‘그대 아직도 꿈꾸고 있는가’, 윤정모 ‘에미 이름은 조센삐였다’ 등을 번역했고, 고려대 정종화교수(영문학)등의 소개로 ‘토지’의 깊은 세계에 눈뜨게 됐습니다.”

98년부터 번역에 착수해 ‘Land’라는 제목으로 제콜로사에서 지난해 2월 1권을 발간했고, 올해 9월까지 2권을 마칠 예정이다. 우리말판으로는 3권에 해당하는 분량. 독일어판은 전 10권으로 완간될 예정이다.

“97년 처음 박경리선생을 원주 토지문화관으로 찾아 뵈었죠. 박선생께서는 ‘외국인이 제대로 된 번역을 할 수 있을까’라는 듯한 탐탁치 않은 눈치셨어요. 제 의욕을 느끼셨는지 다행히 결국 허락을 하셨습니다.”

그가 말하는 ‘토지’의 가장 큰 매력은 살아 움직이는듯한 생동감넘치는 인물상. ‘백정부터 양반까지’ 한시대 모든 계급의 총체상(總體像)을 그려낸 솜씨도 탄복스럽다고 그는 밝혔다.

“독일의 경우 토마스 만의 ‘부덴브로크집안 사람들’ 같은 작품이 한 시대의 총체상을 그려낸 작품이죠. 그러나 그 작품도 시민계급의 묘사에 한정될 뿐, ‘토지’처럼 모든 계층을 빠짐 없이 큰 ‘화폭’에 잡아낸 작품은 전세계 문학사를 걸쳐 찾기 힘듭니다.”

물론 원작의 느낌을 살려내는 데는 어려움도 많았다. “‘토지’에는 특히 어떤 사람이 한 말을 다른 사람의 입을 빌어 얘기하게 되는 경우가 많은데, 독일어로 번역하고 나면 누가 한 말인지 명쾌하게 드러나지 않는 경우가 많았어요. 말하는 사람을 직접 밝히면 원작이 가진 맛이 떨어지구요. ‘토지’ 영어번역본도 참고하는 등 고심에 고심을 거듭하게 됩니다.”

그는 불교 유교 무속 등 종교에 관한 풍속 역시 북한에서 오래 생활한 자신에게는 낯설지만, 사전 등 문헌을 검색하는 데 익숙해 큰 문제는 되지 않는다고 덧붙였다.

북한 체류중 만나 결혼한 건축기사 출신 남편 및 미혼인 자녀들과 베를린 교외에서 살고 있는 그는 ‘나를 제외한 온가족이 축구광’이라며 “이번 월드컵 한독전에서 한국을 응원했다”고 말했다.

“이탈리아전을 TV에서 보니 ‘Again 1966’이라는 카드섹션이 눈에 들어오더군요. 1966년에는 나는 독일에 들어와 있었지만, 당시에도 조선(북한)을 많이 응원했습니다.”

가까이에서 본 김일성에 대해 그는 “80년대 당시 50이 넘은 나에게 ‘젊었다면 한국남자에게 시집갔더라면 좋았을 것’이라고 농담했던 기억이 난다”고 밝혔다. 최근 서해교전사태에 대한 느낌을 묻자 “카리스마가 엄청났던 김일성 시대에도 혼자 모든 것을 결정할 수는 없었다. 북한 정권 내부에도 파당과 모험주의가 존재한다”고 그는 말했다.

동아일보 광화문사옥 10층 일민라운지에서 인터뷰에 응하는 동안 그는 간간히 벽면에 전시된 고 일민 김상만(一民 金相萬)동아일보 전회장의 화보를 주의깊게 들여다보며 “1990년 처음 한국에 왔을 때 동아일보로 나를 초청하셨다. 정이 많고 인자한 분이었다”고 회상하기도 했다.

유윤종기자 gustav@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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