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근 신부 “술 중독은 가정까지 파멸시키는 病입니다”

  • 입력 2002년 6월 14일 18시 50분


가톨릭 신부와 알코올 중독자. 그는 4년 전까지만 해도 십수년간 ‘두 얼굴’로 살았다. 최근 교계 신문에 ‘알코올 탈출기’를 연재해 화제가 되고 있는 허근 신부(52·서울대교구 가톨릭 알코올 사목상담소장).

98년 2월 김옥균 주교가 그를 불렀다.

“신부 생활이 중요한 게 아닙니다. 하느님이 주신 생명을 여기서 끝낼 생각입니까.”

김 주교의 나지막한 목소리는 큰 종소리처럼 그의 마음에 울렸다. 그에게서 술을 빼앗은 것은 사랑이었다. 그것은 또 김 주교의 간곡한 설득과 어머니의 눈물이기도 했다.

이전까지만 해도 누군가가 술을 끊으라고 권유해도 그의 입에서는 알코올 중독자를 위해 ‘준비된 변명’이 튀어나왔다.

“내가 무슨 중독이야. 좀 줄이면 되지” “난 마음먹으면 언제든지 끊을 수 있어”라고.

그럴 수 없었다.

“그제야 술의 노예가 돼 버린 내 모습이 보이더군요. 알코올 중독자에게 술은 ‘우상’이나 다름없습니다.”

그 뒤 병원 치료와 함께 단주(斷酒)를 시작했다. 그는 99년 10월 서울대교구 지원으로 알코올 사목센터가 설립되자 자신도 술과 싸우면서 알코올 관련 사목 활동을 펼쳤다. 지난해에는 이번 수기에 앞서 ‘그때 술을 마시지 않았더라면’이라는 시집을 내기도 했다.

“알코올 중독이 무슨 자랑이겠습니까? 그것도 성직자가…. 하지만 술독에서 건진 내 인생에는 새로운 임무가 생겼습니다. 알코올 중독은 자신의 육체와 정신은 물론 가족까지 파멸시키는 무서운 ‘병’입니다. 이를 알리고 막고 싸우는 게 내 일이죠.”

친가로는 7대, 외가로는 6대째인 독실한 가톨릭 집안에서 태어난 그에게 알코올 중독은 의외의 시련이었다. 5남매 가운데 두 동생도 함께 사제의 길을 걷고 있다.

그는 80년 사제 서품을 받을 때까지 술을 입에 대지도 않았다. 하지만 사목 활동을 시작하면서 신자들과 한두 잔 나누던 술이 83년 해병대 군종으로 입대하면서 부쩍 늘었다.

지금은 미사 때 포도주도 먹지 않지만 당시에는 지독한 중독자였다. 어떤 때에는 앉은자리에서 소주 8병, 맥주 24병을 쏟아 붓기도 했다. 술 때문에 아침 미사를 올리지 못하는 일이 다반사였고 신자들과 함께 등산을 가면 샛길로 빠져나가 술에 찌들어 저녁 무렵에야 성당에 들어서곤 했다.“‘한번 중독은 영원한 중독’이 되기 싶습니다. 중독 상태가 심해지기 전에 적절한 치료를 받는 게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술에 관대한 우리 사회의 분위기와 ‘나는 술을 좋아하지, 중독은 아니다’는 자기 과신이 큰 문제입니다.”

2000년 5월 발표된 보건복지부 자료에 따르면 국내 알코올 중독자는 330여만명에 이른다. 또 400여만명은 술을 남용하거나 술에 대한 의존도가 높아 중독의 위험이 있는 것으로 조사됐다. 현재 이 센터에서는 주 3회 알코올 중독과 관련된 치유 모임(02-364-1811)을 갖고 있다. 그가 중독자와 만날 때 자주 하는 농담이 있다.

“아, 소주 먹고 알코올 중독돼서야 되겠습니까. 끊읍시다. 그리고 중독이 아니라 좋은 술을 좀 ‘품위’있게 먹읍시다.”

지난달 20일 아들 셋 모두를 사제의 길로 인도한 그의 어머니가 세상을 떴다. 그가 알코올 중독자일 때 밤잠을 못 이루고, 그가 술을 끊었을 때 가장 기뻐했던 어머니였다.

“정말 많이 울었습니다. 이렇게 허망하게 가시는 것을. 술로 육체와 정신이 망가지니까 ‘어머니의 호소’도 들리지 않더군요. 좀더 일찍 술을 끊었다면….”

그는 최근 ‘어머님을 떠나보내면서’라는 시를 썼다. 술에서 벗어난 신부의 뒤늦은 ‘사모곡(思母曲)’이리라.

‘…/이제는 홀로 있음이 너무 긴 세월이었는지/단주하는 나의 삶이 안심되었는지/홀연히 떠나버린 어머님에게/무슨 낯으로 용서를 구하며/천번만번 속죄해도 깊은 회한 죄책감, 눈물만이 흐르네/….’

김갑식기자 gskim@donga.com

[바로잡습니다]

△15일자 A23면에서 허근 신부의 ‘알코올 탈출기’가 연재 중인 신문은 가톨릭신문이 아니라 평화신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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