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표적 禪僧 진제스님에 듣는 '부처님 오신뜻'

  • 입력 2002년 5월 17일 18시 08분


'남진제 북송담'으로 불리며 이 시대의 대표적인 선지식으로 꼽히는 진제 스님
'남진제 북송담'으로 불리며 이 시대의 대표적인
선지식으로 꼽히는 진제 스님
《19일은 불기 2546년 부처님오신날. 부산 해운정사 금모선원(金毛禪院)과 대구 동화사 금당선원(金堂禪院)의 조실인 진제(眞際·68) 스님. 스님은 높은 선풍으로 선객들 사이에서 송담 스님(인천 용화선원 원장)과 함께 ‘남진제 북송담(南眞際 北松潭)’으로 불린다. 진제 스님은 한국 불교의 선풍을 진작시킨 ‘봉암사 결사’로 유명한 봉암사 태고선원의 조실를 지내기도 했다. 16일 비가 부슬부슬 내리는 가운데 이 시대를 대표하는 선지식(善知識)을 찾아 길을 떠났다. 목적지는 부산도 대구도 아닌 천년 고도 경주였다. 진제 스님은 곧 선원이 개설되는 경주 ‘금천사(金泉寺)’에 머무르고 있었다. 울산에서 경주까지, 다시 금천사가 있는 남산 기슭까지 차로 1시간 남짓 걸렸을까. 스님은 숙소인 ‘금장실(金杖室)’에서 가부좌를 튼 채 손님을 기다리고 있었다. 금장은 부처님의 법을 상징하는 금빛 주장자를 가리킨다.》

-귀한 시간을 내주셔 고맙습니다. 먼저 부처님이 이땅에 오신 뜻을 가르쳐 주십시오.

“‘참 부처님’은 오신 바도 없고 가신 바도 없습니다. 자기의 참 모습을 알면 부처요, 모르면 범부인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자신의 본성을 모른 채 허상을 찾아 다니는 겁니다. 부처님이 오신 뜻은 중생들이 수행을 통해 자신의 참 모습을 찾으라는 것입니다.”

-자신의 참 모습을 알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진리의 눈이 열린 자만이 부처님의 ‘살림살이’를 알 수 있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바른 진리를 아는 스승을 찾아 바른 수행법을 배워야 합니다. 이 수행을 하면서 ‘한번 죽었다 살아나면’ 바른 눈(정안·正眼)이 열립니다. 본디 인생에는 무한한 전생(前生)과 후생(後生)이 있습니다. 80, 90세 된 노인에게 물어보십시오. ‘벌써 그렇게 됐나’라고 할 겁니다. 하지만 길게 보여도 인간 100년은 ‘휙’ 지나가는 것이고 곧 무한한 후생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허상을 탈피해 참 나를 밝히는 꾸준한 연마로 지혜를 얻으면 참된 생을 누릴 수 있습니다.”

-그 수행법이 참선입니까. 요즘 참선에 대한 관심이 큽니다.

“그렇습니다. 참선은 마음의 갈등을 던져버리는 것입니다. 참선은 꼭 앉아서 하는 게 아닙니다. 앉고 눕고 걷고 일하고 돌아다니면서 언제나 화두를 드는 것입니다. 최근 서양 지식인들이 참선에 관심을 갖는 것도 참선의 가치를 인정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꼭 수행자가 되지 않더라도 참선의 ‘맛’을 알면 건강한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진제 스님은 경허 혜월 운봉 향곡으로 이어지는 법맥을 이었다. 스님은 20세이던 1954년 설석우(薛石友) 스님을 은사로 출가한 뒤 ‘부모미생전 본래면목(父母未生前 本來面目·부모에게서 태어나기 전 어디서 왔는가)’라는 화두를 들고 각고정진했다.

특히 진제 스님과 석우 스님의 열반 뒤 법사 스님이 된 향곡 스님이 선문답으로 법력을 겨룬 ‘법거량(法擧揚)’은 유명하다.

향곡 스님이 그에게 준 준 화두는 ‘향엄상수화(香嚴上樹話)’. 어떤 사람이 아주 높은 나무 위에서 손이나 발로 가지를 잡거나 밟지 않은 채 나뭇가지를 입으로 물고 있을 때, 다른 사람이 ‘달마가 서쪽에서 온 까닭(祖師西來意)’을 묻는다면 어찌할 것인가. 이는 대답하지 않으면 묻는 이의 뜻에 어긋나고, 입을 열면 나무 아래로 떨어져 죽을 상황이다.

2년여를 정진한 끝에 화두를 풀어 법사 스님께 바친 진제 스님은 다른 화두에는 막힘이 없었으나 ‘일면불(日面佛) 월면불(月面佛)’이란 화두에 가로막혔다. 이 화두는 중국 당나라 고승 마조스님과 관련이 있다. 마조 스님이 병 때문에 누워 있는 데 원주가 찾아와 “화상께서는 요즘 건강이 어떠십니까”라고 물었다. 이에 마조스님이 ‘일면불 월면불’이라고 답했다는 것.

진제 스님은 5년의 각고 끝에 일체의 걸림이 없는 경지에 오른 뒤 오도송을 읊는다.

一棒打倒毘盧頂(일봉타도비로정·한 몽둥이 휘두르니 비로정상 무너지고)

一喝抹却千萬則(일할말각천만칙·벽력 같은 일할에 천만 갈등 흔적 없네)

二間茅庵伸脚臥(이간모암신각와·두 칸 토굴에 다리 펴고 누웠으니)

海上淸風萬古新(해상청풍만고신·바다 위 맑은 바람 만년토록 새롭도다)

-스님이 젊은 수좌시절 향곡 스님과 벌인 법거량은 유명합니다. 불가에서는 사제 관계가 엄격하지 않습니까.

“진리는 광대무변(廣大無邊)합니다. 동쪽만 보고 깨달았다고 할 수 없습니다. 동서남북 상하좌우를 다 봐야지요. 그래서 참선하는 자는 스승 앞에서 문답 점검을 받고 깨달아야 합니다. 혼자 도를 깨달았다고 자부하는 것은 다른 길로 빠지기 쉽습니다. 이렇듯 은사 관계는 엄격하지만 법을 논하는 것은 백정이 서로 마주쳐 칼질하는 것과 같습니다.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이고 조사를 만나면 조사를 죽인다’는 ‘살불살조(殺佛殺祖)’가 선 수행자의 원칙입니다. 인정사정도 없고, 우물쭈물이 통하지 않습니다. 즉답(卽答)이 나오지 않는다면 공부가 부족한 것입니다.”

-남 진제, 북 송담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웃음)”

-들어보셨습니까.

“허허, 들었습니다.”

-혹, 두분이 법거량을 하신 적은 있습니까.

“송담 스님은 젊은 시절 동화사에서 수행하던 시절 만난 적이 있습니다. 따로 법을 논해본 적은 없습니다. 오랜된 일입니다만 가깝게 지내는 숭산 스님과 대화를 나누면서 셋이 한번 만나면 어떠냐는 이야기를 한 적은 있습니다.”

-스님은 평소 뜻이 통하는 지음(知音)을 만나고 싶다고 하셨습니다. 만나셨는지요.

“아직 못 만났습니다. 지금도 동화사와 해운정사 선방의 문을 열어 놓은 것은 나이에 관계없이 지음을 만나기 위해서입니다.”

진제 스님은 바깥 세상을 멀리 하고 은둔하는 선승들과 달리 스님을 찾는 이들을 마다하는 적이 없다. 스님은 눈 밝은 스승, 이른바 ‘명안종사(明眼宗師)’를 찾는 이들이 방문하면 신분여하에 관계없이 언제나 선문답으로 점검을 한다.

-바깥 세상이 혼란스럽습니다. 권력형 부정비리로 시끄럽고 올해말에는 대통령 선거가 있습니다. 지도자의 덕목을 말씀해주신다면.

“세상의 지도자가 되려는 분들은 바르게 살고 덕행을 쌓아야 합니다. 지혜와 덕행이 겸비되지 않으면 지도자 자질이 없습니다. 특히 지혜가 없다면 선과 악을 가리지 못합니다. 우리 민주주의의 역사가 50여년이라지만 오늘날까지 ‘갈짓자’ 걸음을 하고 있습니다. 지도자가 수행을 통해 지혜를 얻는다면 온 국민이 부모가 되고, 아들 딸이 됩니다. 거기에 친소 관계가 있을 수 없습니다. 적이 있을 리 없으니 모든 사람이 지도자를 따르게 되죠.”

-한국 선불교의 세계화를 위한 방안이 있습니까.

“중국은 공산화로 선의 맥이 단절되다시피했고, 일본은 불교가 전반적으로 약합니다. 선불교의 맥은 한국에 남아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오는 10월20일 해운정사에서 ‘국제무차선대법회’를 열 계획입니다. 서옹 스님(고불총림 방장)과 산승(山僧·진제 스님), 중국 정혜스님, 일본 임제종의 고승 등 한중일 3개국 스님이 모여 법문을 나눌 계획입니다. 선불교의 실체와 진수를 세계에 알릴 수 있는 기회가 될 겁니다.”

무차선회(無遮禪會)란 성인과 속인, 상하 귀천에 관계없이 모두 평등하게 불법을 논하는 자리. 이 대회는 1912년 방한암 스님이 금강산 건봉사에서 개최한 데 이어 서옹 스님이 98년, 2000년 백양사에서 개최한 바 있다. 하지만 3개국의 내로라하는 선승들이 참여하는 것은 처음이다.

-독자들을 위한 법문을 남겨 주십시오.

“‘일파유조수부득’(一把柳條收不得·한주먹 버들가지 잡아 얻지 못했다)

‘화풍탑재옥난간’(和風搭在玉欄干·봄바람에 옥난간 벽에 걸어둔다).”

-풀어주신다면.

“하하.”

-좀 알기 쉬운 법문은 없습니까.

“쉬우면 법이 아닙니다. 이 법문에 산승이 평생 공부해서 얻은 것이 담겨 있습니다. 한번 풀어보십시오. 꼭 도인이 되지 않더라도 화두를 품고 살면 마음이 편해집니다.”

즉문즉답(卽問卽答). 폭포수처럼 쏟아지는 스님의 말은 시종일관 내려치는 칼끝처럼 예리하다. 아무런 장식없이 방석만 있는 금장실에 갑자기 빗소리와 함께 차가운 바람이 밀려오는 듯 했다.

경주〓김갑식기자 gskim@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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