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5만그루 167억원짜리 숲 가꾸는 함번웅씨

  • 입력 2002년 4월 11일 14시 13분


중국 시인 도연명이 쓴 ‘도화원기’. 어부가 계곡을 따라 올라가자 복숭아꽃이 만발해 있고, 꽃 사이를 지나가자 세상사를 잊고 시름 없이 살아가는 사람들의 별세계가 나왔다고 쓰여 있다.

4월을 맞은 경북 경산시 용성면 송림리 동아임장(林場)의 입구 역시 복숭아꽃이 가득하고 계곡이 벌어져 있다. 계곡 양편으로 산줄기들이 갈빗대처럼 퍼져 있어 이른바 ‘겹산’ 지대인 이곳은 임업자 함번웅씨(60) 소유의 30만평 규모의 사유림. 영남대 건축학과를 졸업한 뒤 83년까지 대구에서 연 매출 60억원 규모의 건설업체를 운영했던 함씨는 83년 ‘나무를 잘라 돈을 버는 사업’에서 ‘나무를 심고 키워 돈을 버는 사업’으로 방향을 180도 바꾸었다.

함씨의 동아임장은 예사로운 숲이 아니다. 함씨가 철저히 생물 다양성 보존과 미래 경제적 가치를 고려해 꾸려온 일종의 ‘노아의 방주’다.

그는 두 가지 목적에서 이 ‘방주’를 만들었다. 우선 아직 서양 의학이 뚜렷이 질병치료의 인과관계를 규명하지 못하고 있는 갖가지 약용식물들이 환경변화로 인해 하나둘씩 사라져가고 있었다. 두 번째로는 수십년 키워야 하는 기존의 목재용 장육림(長育林) 만으로는 나무 심기를 생업으로 삼은 이들이 생활을 이어갈 수 없었다. 다양한 나무들을 심어야 했다.

그는 지난 20년간 이곳 30만평의 임장에 모두 110종의 나무 45만그루를 심었다. 이같은식목 수종은 단일 사유림으로는 전국 최고 수준이다. 자생하는 식물들을 포함하면 1000종을 훨씬 웃돌 것으로 추산된다.

그는 이 ‘방주’에 태울 희귀한 식물들, 약재 정보들을 구하기 위해 중국 일본 등지를 10여차례 다녀왔다. 임학자들, 외교관들에게 부탁해 희귀 약용 식물에 관한 국내외 서적 논문들을 수십권씩 구했다. 핀란드인들이 사우나를 할 때 자작나무로 몸을 두드리는 이유가 당뇨 고혈압 등에 효험이 있는 수액을 묻히기 위해서라는 것을 알아내기까지 4년간 애태우며 인터넷을 뒤지기도 했다. 89년에는 당시 수교하지 않은 한 공산권 국가로 밀입국한 적도 있었다.

“암치료에 탁월한 효능을 가진 희수나무를 구하기 위해서였지요. 그곳에 입국해 호텔 방을 잡자마자 식물 채취를 위해 입국했던 일본인 학자가 체포됐다는 뉴스가 TV에서 나오더군요. 하지만 중도 포기할 수는 없었습니다. 수소문 끝에 종자를 구했지요. 출국이 걱정됐습니다. 주위에 많은 암환자들도 생각났고요. 우선 씨앗을 은박지로 싼 다음 비닐로 포장했지요. 그곳에서 산 술병의 술을 비운 다음 씨앗을 넣고 술을 다시 채웠습니다. 출국 수속을 밟는데 갖가지 감정으로 가슴이 미친듯이 뛰더군요.”

이 일을 알고 있는 주위 사람들은 그를 ‘현대판 문익점’이라고 부른다. 하지만 가슴 졸인 노고도 허사로 돌아갔다. 희수나무 씨앗이 풍토에 맞지 않아 죽고 말았던 것이다.

이후 그는 나무 심기를 업으로 삼고 싶다고 찾아오는 젊은이들에게 ‘최적지(地)에 최적수(樹)를 심어야 한다’는 충고부터 한다. 다행히 그가 가진 사유림에는 10여개의 봉우리가 각각 동서남북 방향으로 나 있어 각양각색 식생들의 성장 조건을 어느 정도 맞출 수 있다(그는 이같은 ‘겹산’을 구하기 위해 78년부터 여러해 동안 경북 산천을 돌아다녔다).

노아가 자기 방주에 태울 생물들을 정성들여 골랐듯이 그는 자기가 키울 식물들의 성격을 면밀하게 관찰해서 심었다. 경북대 임학과 홍성천 교수, 대구의 한약사 조무산씨 등이 그를 도왔다.

동향 산(山)에는 느티 자작 물박달 등을, 서향 산에는 가시오가피 등을, 북향 산에는 산벚 등을, 남향 산에는 두릅 오가피 등을 집중적으로 심었다. 큰 나무들의 사이 빈 땅에는 중간 크기 나무와 작은 식물을 심었다. 가령 느티나무 옆에는 중간 크기인 산사나무를, 산사나무 옆에는 작은 식물인 호랑가시 작약 등을 심었다.

나무를 심기만 한 것이 아니라 책을 찾아가며, 직접 먹어가며 자신의 숲에서 나고 자라는 나무 풀들에 어떤 효능이 있는지를 파악했다. 질경이는 거담 요도염에, 민들레는 황달 간염에, 사철쑥은 담낭 결석에, 쇠비름은 이질 백일해에 좋다는 것을 알게 됐다.

그는 “아직도 일부 의사들은 이들의 효능을 근거 없다고 한다. 그러나 99년 미국 정부는 현대 의학이 파악하지 못하는 부분들이 있다는 사실과 ‘대체의학’의 존재를 인정했다. 미국의 대학 연구소, 제약회사들은 이제 아시아 각국의 민간요법과 약용식물들을 입수하기 위해 채집반들을 내보내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아직 국내에서 중요성을 제대로 인정받지 못하고 있는 약용식물들의 효용이 빛을 볼 때까지 지켜주는 것이 자신의 의무라고 생각하고 있다. 이같은 그의 노력을 인정한 산림청에서는 97년 그의 임장에 숲길을 내주기도 했다. 그의 노력을 전해들은 이들도 매년 200명 안팎으로 찾아들고 있다. 함씨처럼 임장을 운영해보고 싶다는 이들이다.

함씨는 이들을 위해 자신은 “쇄빙선 역할을 하겠다”고 말한다. 임업이 뜻 깊은 일임은 물론이고 경제적 보상도 가져다 주는 것임을 보여주겠다는 것이다.

“생물 다양성을 보존한다는 것은 이른바 ‘자산 포트폴리오’를 다양하게 구성하는 방식과 닮은 데가 많습니다. 저의 숲에는 1∼2년내에 수익이 들어오는 두릅 오가피 오미자 참중, 5∼6년 내에 수익이 들어오는 산수유 살구 산벚 등도 많습니다. 물론 가장 흐뭇한 것은 수십년 기다리면 의젓하게 자라나는 느티나무 물푸레 등 장기 수종들을 바라볼 때지만요.”

그는 최근 대구 월드컵 경기장 등에 이들 장기 수종을 관상수로 공급했다. 처음 임장을 열 무렵 한 그루에 100원 안팎이던 느티나무 물푸레 등의 묘목이 이제는 20만∼30만원을 호가한다. 최근 그가 가진 45만그루 수목들의 가치를 따져보자 167억원이라는 계산이 나왔다. 1979∼83년 사이에 산지 30만평을 평당 100원씩, 3000만원에 사들여 거둔 결실 치고는 엄청난 수익률이다.

그러나 그가 진실로 행복해할 때는 ‘돈 계산’을 할 때가 아니다. 어려서부터 한학을 배워온 그는 도시에서 사는 동안 늘 ‘내게는 이 삶이 맞지 않는 것 같다’는 생각에 겉돌았다.

불혹을 넘긴 나이에 새로 접어든 ‘숲속에서의 삶’에 그는 깊은 행복감을 느끼고 있다. 나무들의 성장은 신비롭기만 하다. 어느 결엔가 숲을 찾아온 딱따구리 직박구리 멧돼지 너구리 족제비들은 그의 ‘방주’를 찾아온 정다운 벗이 되었다.

그는 이곳에서 돈을 벌면서 무릉도원에 비길 별세계를 즐기고 있는 것이다. 053-817-1474

경산〓권기태 기자 kkt@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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