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문열 역사소설 '큰바람 불고 구름 일더니' 연재 시작

  • 입력 2002년 3월 27일 18시 04분


자료 취재를 위한 중국여행 중 시안 외곽에 복원된 진시황의 아방궁 앞에 선 작가 이문열
자료 취재를 위한 중국여행 중 시안 외곽에 복원된 진시황의 아방궁 앞에 선 작가 이문열
동아일보는 매주 금요일 발간되는 WEEKEND 에디션에 소설가 이문열씨가 새로 쓰는 초한지(楚漢志), ‘큰 바람 불고 구름 일더니’의 주간 연재를 29일 시작합니다. 초패왕 항우와 한고조 유방의 맞대결은 2200여년전의 일이지만 이 시대에 나온 ‘역발산기개세’ ‘사면초가’ ‘합종연횡’ 등은 현대 한국인도 즐겨쓰는 용어입니다. 그들을 움직였던 정치적 야망과 음모, 의리와 배신, 사랑과 증오도 현재형으로 반복되고 있습니다. 등단 22년째를 맞는 작가 이문열씨는 이 작품으로 작가 인생에 한 획을 긋고자 하는 뜻을 밝혔습니다. 연재에 앞서 이씨가 작품의 무대인 중국 시안에서 독자들에게 보내온 ‘연재 시작의 각오’와 작품 줄거리, 화가 박순철 교수(추계예술대)의 첫 인사를 싣습니다.

▼이문열씨가 中 현장서 보내온 '연재를 시작하며'

장쑤(江蘇)성 쉬저우(徐州)는 삼대(三代·중국 고대 왕조인 하, 은, 주를 일컬음)의 전설적인 인물 팽조(彭祖) 이래로 수천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고도(古都)다. 동서 축과 남북 축이 교차하는 교통의 요충이면서도 사방이 훤히 열린 지형이라 옛부터 전란이 잦은 땅이기도 했다.

가깝게는 국공내전(國共內戰)을 판가름한 세 번의 큰 싸움 중 하나인 화이허(淮河)전투가 바로 이 쉬저우에서 벌어졌으며, 중일전쟁의 한 분기점이 되는 타이얼좡(臺兒莊) 전투도 다르게는 ‘쉬저우 대회전(大會戰)’이라 불린다.

‘삼국지 연의’에서는 이 쉬저우를 놓고 조조와 유비가 먼저 격돌하였고, 나중에는 여포에게 넘어갔다가 그 때문에 여포가 조조에게 사로잡혀 목숨을 잃는 곳이기도 하다.

하지만 내가 쉬저우 벌판을 헤매며 더듬고 있는 것은 그런 역사가 아니라 그 이전 서초패왕(西楚覇王) 항우와 그의 도읍 펑청(彭城)이다. 먼저 천하를 평정하고 열여덟명의 왕과 제후를 봉한 항우는 펑청이라 불리던 지금의 쉬저우를 도읍으로 삼았다.

나는 어제 희마대(戱馬臺)에 올라 ‘역발산 기개세(力拔山氣蓋世)’를 읊조리던 항우의 기상을 보았으며 그 곁 우희묘(虞姬廟)에서는 우미인의 애절한 화해하가(和垓下歌·해하에서 항우가 유방의 군에게 포위당하자 우미인이 부르고 자결했다는 노래)를 들었다.

구리산(九里山)을 돌아보며 돌이킬 수 없는 패왕의 패색을 느껴 보았고, 해하(垓下)에서는 머지않은 우장강(烏江·유방에게 패한 항우가 자결한 곳)의 비극을 예감했다.

오늘은 또 그런 항우의 대역(對役)이었던 유방의 고향 페이(沛)현을 찾아갔다. 시멘트를 부어 억지스레 만든 한성(漢城)과 가풍대(歌風臺)를 돌아보며 역사가 승자에게 부여하는 영광이 뜻하는 바를 곱씹어 보았다.

하지만 그곳에서 얻은 보다 큰 소득은 이 순진한 악당이면서도 교활한 바보, 닳고닳은 협객이면서도 뻔뻔스럽고 겁 많은 인자(仁者) 그리고 무엇보다도 위대한 공허(空虛)였던 한 사내의 진실을 비추고 있는 민담과 야사들이다. 번쾌의 칠십몇대 자손이 열고 있다는 개고기 집이며 한신의 자손이 열고 있다는 식당 만큼이나 믿음이 가지는 않지만 그것들에는 역사라는 말로 화석화되지 않는 신선함이 있다.

내일 우장강을 돌아보고는 시안(西安)으로 떠나려 한다. 당나라 수도로 널리 알려진 장안(長安)의 오늘을 보고자 해서가 아니라 진 제국의 수도 센양(咸陽)의 옛터를 더듬어 보러 간다. 진시황을 보다 가까이서 한번 더 읽어보러 간다.

이러한 때 왜 하필이면 항우이고 유방이고 진시황인가. 2000년이 넘는 세월을 수없이 거듭하여 읽고 해석해온 이 낡은 텍스트에서 또 무엇을 읽어내려 하는가.

지금 우리에게 통일은 더 이상 추상적인 염원이 아니라 구체적인 현실로 다가오고 있다. 그런데 그들 세 사람은 겨우 이십여년 사이에 전혀 성격을 달리하는 세 종류의 통일을 보여주었다. 곧 이러한 때이기 때문에 더욱 그들을 얘기해야 한다고 말할 수도 있다.

또 우리사회는 오래 전부터 참다운 지도자의 부재(不在)로 고통당해 왔다. 그런데 이제 더듬어 보려는 이 시기는 다양한 지도자의 유형을 펼쳐 보이는 것으로도 유명하다. 진시황과 항우와 유방이라는 개성 뿐만 아니라 그의 막료와 측근들도 손색없는 지도자의 유형들을 보여준다. 거기다가 오랜 세월 거듭 읽히고 분석되어 왔기 때문에 지금의 우리에게 그들은 오히려 더 유효한 전범이 될 수도 있다.

이제 시안에서 얻고자 하는 것도 무슨 대단한 새로움은 아니다. 절대권력의 계승자로서 궁정 암투를 거쳐 자신의 권력기반을 다진 진시황의 개성이나 좀 더 실감나게 잡혀오고, 관료체계와 법치술의 효율성에 바탕한 군사주의로 위에서부터 아래로 강요된 통일이 민중에게 끼친 고통과 해악만 제대로 그려낼 수 있게 된다면 나는 곧 돌아가 쓰기 시작할 것이다.

장편연재 ‘큰 바람 불고 구름 일더니’를, 번역이나 평설(評說)이 아니라 내 중년의 볼만한 목록이 될 역사소설로서의 진말한초연의(秦末漢初演義)를.

<중국 쉬저우에서>

▼삽화 맡은 추계예술대 박순철 교수

‘큰 바람 불고 구름 일더니’의 그림을 맡아 어깨가 무겁다. 매주 ‘작품 한점씩 그린다’는 심정으로 임하려고 한다. ‘큰 바람 불고…’는 나만의 작업이 아니다. 철저히 작가 이문열 선생과 호흡을 함께 하고 글의 맛을 살리는 그림이 되어야 할 것이다.

무엇보다도 붓놀림을 가볍게 하지 않으려 한다. 웅혼한 그림을 그리고 싶다. 소재로는 수묵인물화가 중심이 되겠지만 때로는 탁본 등의 기법도 동원할 것이며, 동물이나 산천의 어느 부분이 인물의 내면을 묘사하는 상징으로 등장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항우와 유방이 천하를 호령하였다고는 하지만 그들도 역사 속의 한 티끌일 뿐. 거대한 전투의 한 장면이거나 산천 앞에서라면 그들조차 한 점으로 묘사될 수 있으리라.

내게 초한지의 시대, 즉 진말한초(秦末漢初)의 시대는 무엇인가. 독선적이되 대장부인 카리스마의 항우가 있고, 자신의 목표를 위해 비굴도 감수하는 유방의 솔직한 현실감각이 있으며, 장량 한신 같은 현대 전략가들의 뒤통수를 치는 지혜의 인물들을 만날 수 있는 시대다. 그런가 하면 우정 때문에 목 끝에 칼을 겨눈 적조차 용서하는 의인들이 살았던 시대이기도 하다.

그 거대한 인간 드라마를 읽다 보면 그때나 지금이나 사람이 사는 모습은 크게 다를 것이 없다는 생각이 든다.

△1963년 경남 함양 출생

△홍익대 미술대 동양화과 및 동 대학원 졸업

△현 추계예술대 교수

▼소설의 줄거리

이 소설이 다루는 시기는 뒷날 한고조 유방의 책사가 되는 한(韓)나라 사람 장량(張良)이 진시황을 습격하는 서기 전 218년부터 사면초가(四面楚歌)의 위기에 몰린 항우가 해하에서 휘하 장수들에게 마지막 연회를 베푼 뒤 자결함으로써 한(漢)나라가 다시 천하를 통일하는 한고조 5년, 즉 서기 전 197년까지의 20여년이다.

초반 10년은 진(秦)의 통일전략에 대항하던 전국시대의 육국(六國) 즉 연(燕) 제(齊) 초(楚) 한(韓) 위(魏) 조(趙)나라가 합종연횡(合從連衡)의 외교술을 펼치다가 결국 진에 의해 차례로 멸망하는 과정을 그리는데 초점을 둔다. 합종은 6국이 종(從)으로 연합해 진과 대결구도를 만들었던 외교책. 그러나 곧 6국이 각각 진 나라와 횡적 동맹을 맺어야 한다는 주장, 즉 연횡책이 힘을 얻게 됐다. 결국 진은 약해진 합종의 동맹고리를 모두 깬 뒤 6국을 멸하고 통일을 이루었다.

후반 10년은 진시황이 죽은 뒤 진승(陳勝)·오광(吳廣)의 농민반란으로 진나라가 혼란에 빠지자 각각 궐기한 항우와 유방이 다시 천하의 패권을 놓고 다투는 시기다. 대미는 황제가 된 유방이 고향에 돌아가 승리축하연을 벌이면서 대풍가(大風歌)를 부르는 것. 연재소설의 제목은 대풍가의 첫 구절 “큰 바람 불고 구름 일더니(大風起兮雲飛揚)”에서 따 온 것이다. 이 노래는 ‘사기(史記)’ 등에 전한다.

항우와 유방의 드라마틱한 일진일퇴는 손에 땀을 쥐게 한다. 진 나라의 수도 센양을 쟁탈하기 위해 지금의 산시성 동쪽 홍문(鴻門)에서 항우와 유방이 일전을 벌였을 때만 해도 유방의 군사는 항우의 4분의 1에 불과했다. 그런 유방이 어떻게 천하 통일의 최종 승자가 될 수 있었을까. 그 과정에서 장량 한신(韓信) 영포(英布) 등 참모집단이 보여주는 고도의 정치적 감각, 군중 선동과 상징조작, 절대 권력의 부패 등은 현대 정치사보다 더 역동적으로 정치와 인간 내면 야심의 상관관계를 보여준다.

작가 이문열씨는 1988년 ‘삼국지’를 평역한 바 있다. 삼국지의 시대는 한나라로 통일된 천하가 200년도 지나지 않아 다시 위(魏) 촉(蜀) 오(吳) 등으로 분열된 시대를 다룬 것. 그러므로 작가는 삼국지의 전 시대로 역사기행을 떠나는 셈이다.

저자는 이번 집필을 위해 기존의 ‘서한연의(西漢演義)’‘한신전(韓信傳)’ 등을 번역, 평설하지 않고 사기, 한서, 자치통감 등을 참고했다. 또 한고조 유방이 한신, 영포 등 목숨을 다해 자신을 도왔던 책사들을 제후억멸책 차원에서 제거해 나가는 통일 이후 과정은 그리지 않고 통일 과정 그 자체에 초점을 맞출 계획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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