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횡설수설]홍찬식/운보 김기창

  • 입력 2002년 2월 22일 18시 13분


운보 김기창 화백이 타계한 지 1년이 지났다. 세상을 떠나고 없을 때 그 사람이 제대로 보인다더니 우리 문화계의 빈자리가 더 커 보인다. 화가의 그림과 삶은 떼어놓고 생각할 수 없다. 그림 속에는 화가가 걸어온 삶이 녹아 있기 때문이다. 그는 참으로 드라마틱한 인생을 살았다. 요즘 임권택 감독이 화가 장승업의 일대기를 영화로 만들고 있다지만 일곱 살 때 장티푸스에 걸려 청각을 잃은 뒤 당대 최고의 화가가 된 그의 삶도 영화로 꾸미기에 손색이 없다. 그의 삶이 더 아름다운 것은 온갖 역경을 극복하고 ‘해피엔드’로 마무리되기 때문이다.

▷운보를 처음 만나보고 놀랐던 것은 청각장애인인 그가 말을 아주 잘한다는 것이었다. 종이를 놓고 필담(筆談)을 나누다가도 중요한 대목에 이르면 말문을 열어 의사를 전달했다. 전시회 개막식 같은 모임에서도 연설을 꽤 잘했다. 또 하나 놀란 것은 낙천적이고 쾌활한 성격이었다. 껄껄껄 웃는 호탕한 웃음은 그의 트레이드 마크였다. 그는 힘들 때일수록 창작에 몰두했다. 1976년 부인(박래현 화백)을 먼저 떠나보내고 실의에 빠졌지만 곧 ‘바보 산수’를 세상에 내놓았다. 전통 민화를 응용해 만든 이 그림들은 해학으로 넘친다. 아내를 잃은 슬픔 속에서 어떻게 유머러스한 그림이 나올 수 있었을까. 눈물이 아닌 해학을 통해 아픔을 이겨내려는 것으로 이해된다.

▷운보의 대표작은 ‘바보산수’ ‘문자추상’이 꼽히기도 하지만 이보다는 1952년작 ‘예수의 생애’가 아닌가 싶다. 한국전쟁이 발발한 뒤 시골의 창고를 고쳐 피란생활을 하면서 제작한 것으로 총 30점으로 이뤄져 있다. ‘수태고지’부터 ‘승천’까지 예수의 일생을 표현하고 있는데 화폭에 등장한 인물들이 모두 한복을 입고 있으며 배경도 우리나라인 것이 눈길을 끈다. 전쟁의 불안한 와중에 창작에 몰두해 만든 역작(力作)이다.

▷서울 덕수궁 국립현대미술관 분관에서는 그의 1주기 추모전이 열리고 있다. 출품작 중에는 ‘예수의 생애’도 포함되어 있다. 그동안 일반에 공개되지 못하다가 모처럼 선을 보이는 것이다. 같은 화가라도 순탄한 삶을 살았던 사람보다는, 생전에 우여곡절이 많았던 화가들이 후대에 대중적인 인기를 누린다. ‘고독한 화가’ 이중섭이나, 극심한 정신병에 시달렸던 고흐 같은 화가에 사람들이 매료되는 것도 그런 이유에서다. 추모전에 전시된 운보의 그림에서도 같은 감동을 느끼게 된다.

홍찬식 논설위원 chansik@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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