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운교수의 여가클리닉]할머니 책한권 들고 스키장 가세요

  • 입력 2002년 1월 24일 16시 19분


Q : 서울 대치동의 혜민이 할머니입니다. 아들이 결혼도 빨리하고 아이도 일찍 낳아 초등학교 4학년인 손녀가 있을 뿐이지 아직 저 스스로를 할머니라고 생각해본 적은 없어요. 이번 주말에 아들 내외가 스키장에 함께 가자고 해요. 그런데 따라가서 스키를 배우자니 자신없고, 그렇다고 스키장에서 구경만 하자니 그것도 그리 맘 편할 것 같진 않네요. 혹시 며느리가 인사치레로 던진 말을 갖고 내가 괜한 고민을 하는 건 아닌지 이젠 정말 할머니가 됐구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어째야 하나요?

A : 제가 독일에서 공부할 때 스키장에서 본 참 인상적인 장면이 있습니다. 한 독일할머니가 스키장이 내려다 보이는 카페에서 선글래스를 머리 위에 올린 채 책을 읽는 모습이었어요. 손녀가 와서 무언가를 이야기하고 다시 스키장으로 나서는 모습을 웃으며 바라보고는, 커피를 마시며 다시 책을 드는 모습이 어찌나 아름답게 보이던지….

스키장에서 꼭 스키만 타란 법은 없습니다. 흰 눈으로 덥힌 산과 알록달록한 사람들 모습이 바라다보이는 카페 한 구석에서 책을 읽는 것도 스키장을 즐기는 매우 좋은 방법이죠. 물론 일년에 몇 번 가지도 않는 스키장에서 책을 읽어야 하냐고 반문하시는 분이 계시겠지만 그럼 집에서는 책을 읽으시나요? 또 하루종일 스키 탈 수 있는 체력을 가진 사람은 그리 많지 않아요. 결국 본전 빼려고 대부분 무리한다는 이야기죠. 집에 돌아와서는 힘들게 놀았으니 다시 쉬어야 하고요.

혜민이 할머니, 책 한 권 들고 스키장에 함께 가시는 건 어때요? 저는 ‘조선왕조실록’이나 ‘명성황후’에 관련된 책을 추천합니다. 요즘 금요일만 빼고는 임금님들이 매일 텔레비전에 나오잖아요. 그러다보니 제 조카는 모든 내용을 뭉뚱그려서 ‘정난정이 왕건과 결혼해서 대원군하고 뭬야하며 싸우는 것’으로 이해해버리더군요. (물론 아이들이 그 시간까지 텔레비전을 보게 해서는 안 되겠지만 말입니다.)

아무리 디지털시대고 매스미디어가 주된 정보전달 매체이긴 해도 할머니의 구수한 옛날이야기는 여전히 경쟁력 있습니다. 오늘날 가족이 해체되는 가장 큰 이유는 할머니의 옛날이야기와 같은 소프트웨어가 없기 때문이죠. 가족은 대화로 만들어지고 유지됩니다. 할머니가 손주에게 해 줄 이야기가 없다면 더 이상 할머니가 아닙니다.

문정왕후에게 앞으로 어떤 일들이 일어날지를 연속극에 앞서 이야기해주면 혜민이도 무척 재미있어할 걸요? 스키장에서 돌아오는 길에 여주의 명성황후 생가에 들러 숨겨진 이야기를 자세히 해주는 것도 좋구요.

그런데 뒤주에서 돌아가신 분은 누구고 화덕처럼 달아오른 방에 갇힌 채 돌아가신 분은 누구였지요? 혹시 아세요?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