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래식/이 계절에 듣는 음악]슈베르트의 '겨울 나그네'

  • 입력 2002년 1월 15일 18시 38분


‘눈 속에서 그녀의 발자국을 찾아다녔다, 그녀가 나의 팔에 기대어 푸른 초원을 거닐었던 그 곳….’

가슴 아픈 사랑의 이야기는 세상에 몇 개나 될까. 전 세계의 사람 수 만큼? 그보다 더 많을까?

수많은 사연들 만큼이나 많은 고금의 노래들이 ‘떠난 사랑’을 노래하고 있다. ‘노래의 왕’으로 불리는 슈베르트, 그의 대표작인 가곡집 ‘겨울 나그네’(원제 Winterreise·겨울 여행) 역시 한때 눈이 시릴 듯 푸릇했던 사랑의 초상을 묻고 떠나는 한 젊은이의 비탄을 담고 있다.

서두에 인용한 가사는 네 번째 곡 ‘동결’. 이어지는 곡 ‘보리수’에서 그렇듯이 주인공은 떠나간 이와 함께 보냈던 아름다운 날들을 회상한다. 푸른 들판에서 따스한 사랑의 말이 오갔으리라. 새들도 오직 두 사람을 위해 지저귀는 것처럼 느껴졌으리라.

그러나 이제 눈앞에 펼쳐진 것은 눈덮인 들판. 그때 거닐었던 발자국과 자취를 찾아보았자 찾을 길이 없다. 가사를 쓴 시인 빌헬름 뮐러는 ‘나의 고통이 침묵할 때, 무엇이 그녀에 대해 이야기하리오?’라고 되뇌인다.

가장 즐겨 집어들게 되는 음반은 바리톤 올라프 베어와 피아니스트 제프리 파슨즈의 것(EMI). 80년대 후반부터 촉망받는 신예로 일컬어졌지만 그의 ‘겨울 나그네’ 음반을 추천반으로 꼽는 사람은 많지 않다. ‘겨울 나그네’ 중 여섯 번째 곡 ‘넘쳐 흐르는 눈물’이 요구하는 깊고 묵직한 저음이나 두 번째 곡 ‘풍향 깃발’ 에 필요한 강건한 포르테를 그는 갖추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얼어붙은 사랑’의 노래(동결)에서 베어의 맑은 음성은 약간의 깊은 떨림과 함께 마음속을 파고든다. 모차르트 슈베르트 말러 등 빈 작곡가들의 작품에 특유하게 나타나는 ‘달려가는 슬픔’의 미학을 베어는 손에 잡힐 듯 생생하게 살려낸다.

예전부터 ‘겨울 나그네’는 여러 차례 다른 반주자와 녹음한 디트리히 피셔디스카우의 음반들(DG)이 ‘결정판’처럼 알려져 있었다. 그러나 피셔디스카우의 노래는 깊은 내면의 울림과 더없이 완숙한 시상의 표현을 이루어내면서도 나이가 든 듯한 표정을 보여 ‘청춘의 울림’과 거리가 있다는 한계를 지닌다. 사랑에 절망한 젊은이라기 보다는 노학자의 내성(內省)과 같은 세계라고 할 수 있을까. 그에 비해 베어는 ‘내가 체험한 것처럼’ 더욱 현실적으로 청춘의 꿈과 아픔을 형상화하고 있는 것이다.

사족. ‘겨울 나그네’의 시인인 빌헬름 뮐러는 ‘독일인의 사랑’으로 유명한 소설가이자 언어학자인 막스 뮐러의 부친이기도 하다.유윤종기자gustav@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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