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가 흐르는 한자]外 交(외교)

  • 입력 2001년 11월 8일 18시 39분


外 交(외교)

選-가릴 선 謀-꾀할 모 縱-세로 종 懸-매달 현 詐-속일 사 僑-붙어살 교

말은 또 하나의 有機體(유기체), 生老病死(생노병사)를 거듭하며 끊임없이 모습을 바꾼다. 일례로 ‘經濟’는 經國濟民(경국제민)의 준말로 본디 정치용어였으며 ‘選擧(선거)’는 지금과 달라도 한참 달랐다. 조정의 인재선발 방법이었을 뿐이다. 이처럼 용어의 둔갑은 때로 종잡을 수 없을 때가 많다. ‘外交’ 역시 그런 경우로 司馬遷(사마천)의 ‘史記’에 보인다.

戰國時代(전국시대)라면 그야말로 전쟁으로 지새우던 때다. 諸侯(제후)들이 저마다 천하를 손에 넣겠다는 야심 때문에 中原(중원)은 온통 전쟁의 도가니였다. 하지만 이 같은 세력균형도 中期에 오면 깨어지고 만다. 戰國七雄(전국칠웅) 중 秦(진)나라가 최강국으로 등장했기 때문이다. 얼마나 강했는지 나머지 6國이 합쳐도 당하기 벅찰 정도였다. 사실 후에 있은 秦始皇(진시황)의 통일은 ‘조상 덕’인 측면도 많다.

이 같은 국제정세는 謀士(모사)의 출현을 가져왔다. 즉 6國이 똘똘 뭉쳐 강국 秦나라에 대항하자고 주장한 사람이 있었으니 合縱策(합종책)을 주장한 蘇秦(소진)이 그였다.

반면 이와는 달리 6國이 제각기 1 대 1로 秦을 섬기자고 했던 것이 連橫策(연횡책)으로 張儀(장의)의 전략이었다. 두 사람은 그야말로 中原을 종횡무진 누비면서 자신의 策略(책략)을 펼쳤다. 재미있는 것은 둘다 鬼谷子(귀곡자)의 제자였음에도 주장과 처세는 이처럼 극단적으로 나타났다는 점이다.

그러나 공통점도 없지 않았다. 세치 혀 하나만을 놀려 천하를 주무르고 제후를 요리했는가 하면 懸河(현하·大河를 내리꽂듯 거침없는 말)의 達辯(달변)은 듣는 이로 하여금 是非감각을 마비시킬 정도로 마력을 띠고 있었다. 그래도 말을 듣지 않으면 이번에는 협박과 회유, 詐術(사술)로 ‘어르고 구슬려’ 반드시 목적을 달성해내고야 말았다.

후세 학자들은 이들을 뭉뚱그려 縱橫家(종횡가)라고 불렀으며 司馬遷은 그들의 활동을 ‘外交’라고 했다. 곧 蘇秦과 張儀는 최초의 外交官으로 중국에서는 아득히 2300년 전부터 ‘外交’가 있었던 셈이다.

물론 현재의 外交무대에서 협박과 회유, 詐術이 횡행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自國의 利益을 최우선시 한다는 점에서는 예나 지금이나 다르지 않다. 특히 지구촌 곳곳에 僑民(교민)이 진출해 있어 그들의 재산과 생명을 보호하는 것 역시 국익실천의 중요한 일환이 되고 있다. 僑民보호에 좀더 신경을 써야 한다는 여론이 높다.

鄭 錫 元(한양대 안산캠퍼스 교수·중국문화) sw478@yahoo.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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