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경동-린난 교수 좌담회…"동아시아 신뢰부재 어떻게 극복하나"

  • 입력 2001년 11월 4일 19시 06분


김경동 교수(왼쪽) 린난 교수 (오른쪽)
김경동 교수(왼쪽) 린난 교수 (오른쪽)
‘신뢰’는 교통신호등을 지키는 문제부터 노사, 남북관계, 국제무역에 이르기까지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상호의사소통과 거래의 기반이 된다. 한국 등 동아시아 국가들은 전통적으로 ‘신의’를 소중한 가치로 여겨왔지만 현대에 들어서는 오히려 신뢰의 부재 때문에 국민통합과 경제발전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

2일 서울대 국민윤리교육과(학과장 이온죽) 주최 ‘지구촌 시대의 신뢰회복과 신뢰구축’ 심포지엄에 참석한 사회학자 김경동 서울대 교수와 린난(林南) 미국 듀크대 교수가 서울대 호암생활관에서 대담을 가졌다. 이들은 한국과 동아시아의 신뢰 결여 이유와 신뢰 구축 방안 등에 대해 의견을 나눴다.<편집자>

▽김경동〓서구사회에서 발달해온 민주주의란 근본적으로 ‘사람은 믿을 수 없는 존재’라는 사고에서 출발했습니다. 그래서 의회 등을 통해 신뢰를 제도화한 것이지요. 반면 유교문화권의 동아시아 사회는 전통적으로 신뢰를 소중히 여기는 도덕적 태도를 견지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 동아시아 사회는 신뢰의 사회적 하부구조의 부재로 어려움을 겪고 있습니다. 그 원인을 찾기 위해서는 우리와 남을 갈라놓는 사고에서부터 출발해야할 것 같습니다.붕우유신(朋友有信)이라는 공자의 가르침에도 내 집단, 즉 친구가 된 사람에 대해서는 신의를 지켜야 한다고 강조하지만 타인에 대한 언급은 없습니다.

▽린난〓공자의 성선설(性善說)이 대표적인 예이겠지만 동아시아 사회의 인간관은 기본적으로 인간은 선하다는 것입니다. 반면 근대 서구사회의 인간관은 다윈의 진화론에 기반을 둔 대단히 경쟁적인 사고방식입니다. 흥미로운 것은 이런 인간관을 가진 서구사회는 오히려 신뢰를 일반화해 왔다는 것입니다. 즉 신뢰의 통용에 경계를 두지 않고 누구에게나 동일한 원칙을 적용합니다. 하지만 동양인들은 신뢰의 적용에 뚜렷한 경계를 둡니다. 중국 홍콩 타이완의 친구들 집을 방문해보면 집안은 궁궐처럼 꾸며놓지만 집밖은 쓰레기통처럼 내버려둡니다. 내 것이 아니면 상관하지 않는다는 태도지요. 이런 식으로 신뢰의 통용에도 외부인, 내부인 사이에 아주 명백한 경계를 두고 내부인의 경계안에서만 신뢰를 적용합니다.

린교수는 동아시아 국가들이 근대화의 실패, 식민지 체제 경험, 전쟁의 피폐 등으로 물적, 사회적 자원이 절대적으로 부족했던 역사적 경험때문에 ‘내것 먼저’ 식의 태도를 갖게 된 것이지 자원이 규칙적으로 적정하게 공급된다면 신뢰는 자연스럽게 뿌리내릴 것이라는 낙관론을 폈다.

▽김〓저는 가족, 친족 등 1차적 관계의 튼실한 신뢰가 2차적 관계에까지 확산될 수 있을지에 관심을 갖고 있습니다. 사실 한국에서도 1차적 관계의 신뢰는 이미 2차적 관계의 사회적 자본으로 이용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형태는 대단히 부정적입니다. 예컨대 선거에 혈연 학연 등의 연줄이 결정적인 영향을 미치는 것이죠. 저는 이런 종류의 신뢰를 ‘관계주의(connectionism)’라고 부르는데, 법 제도가 있긴 있어도 사회 구성원 누구나 그것이 집행되는 과정에는 뭔가 보이지 않는 연줄같은 것이 작동한다고 믿고 자신이 이용할 수 있는 ‘관계’부터 찾으려 드는 것입니다.

▽린〓미국에 살면서 그 ‘관계’가 굉장히 다르게 이용되는 것을 체감합니다. 물론 미국인들도 거래를 할 때 자신이 동원할 수 있는 관계가 없는지부터 살핍니다. 그러나 그 찾는 목적이 달라요. 동아시아에서는 법 제도를 피해가는 우회로로 관계를 찾는다면 미국에서의 ‘관계’는 일종의 보증서같은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얘기하자면 동아시아 사회가 관계를 오용하고 있는 것입니다.

▽김〓흥미로운 지적입니다. 동양에서 문제가 되는 것이 미국에서는 긍정적인 사회적 자본이 되는 것이지요. 케네디, 클린턴 전 대통령은 동생이나 아내, 대학 동창들을 내각에 중용했습니다. 그 인선을 시기하는 사람들은 있었지만 사회적으로 지탄받지는 않았습니다. 비록 대통령과 특별한 관계에 있긴 했지만 그들 자신이 자격있는 전문가들이었기 때문이겠지요. 이런 경우는 상처입는 사람이 없는 윈윈(Win-Win)게임입니다. 그러나 만약 한국에서 가족 동창들을 그렇게 등용한다면 비난을 면치 못할 것입니다. 동아시아 문화에서 누가 누구를 추천하거나 소개하는 것은 공익이 아니라 개인의 이익을 위한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내각을 결정할 때도 그렇습니다. 자기가 믿을 수 있는 사람인가가 최우선의 고려요인이 됩니다. ‘관계’ 그 자체는 중립적이더라도 그것이 실현되는 사회문화적 맥락에 따라 이렇게 다른 결과가 빚어집니다.

두 학자의 논의는 누구에게나 투명하게 적용될 수 있는 사회적 약속으로서의 신뢰를 어떻게 제도화할 것인가로 옮겨갔다.

▽린〓무엇보다도 교육의 역할이 중요합니다. 교육은 제도화의 기구입니다. 결코 지식, 정보를 전달하는 것만이 아니라 가치를 내면화시켜 사람들을 한마음으로 묶지요. 좀 엉뚱한 사례로 들리겠지만 20세기에 ‘도덕혁명’의 기치를 내걸어 가장 대대적인 효과를 거두었던 것이 무엇입니까? 바로 마오쩌둥이 이끈 문화혁명입니다. 마오가 혁명을 추진하며 가장 중시했던 것은 어딜 가든지 제일 먼저 문화혁명의 이념을 설파하는 워크숍부터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그를 통해 혁명이념을 수행하는 헌신적인 지지자들을 길러냈습니다.

▽김〓제도를 통해 제도적 변화를 시도한다는 것은 굉장히 어려운 일이지만 교육의 중요성에 관해서는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다만 학교만으로 충분한가에 대해서는 의문입니다. 제도 밖에서도 교육의 기능이 필요합니다. 그런 점에서 시민사회의 역할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한국은 독재권력의 압제 속에서 시민사회의 저력을 길렀고, 특히 지난 10년 동안 NGO의 숫자나 활동이 폭발적으로 늘어났습니다. 이런 시민적 힘을 동력화하면 신뢰의 사회적 인프라 구축에 중요한 자원이 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정리〓정은령기자>ryung@donga.com

▼김경동 교수▼

△1936년 경북 안동 출생

△1972년 미국 코넬대 사회학 박사

△전 한국사회학회 회장

△현 서울대 사회학과 교수

성곡학술문화상 수상(2001년),

지식인모임 ‘비전@한국’ 고문

▼린난 교수▼

△1938년 중국 쓰촨(四川)성 출생

△1966년 미국 미시간주립대학(MSU) 사회학 박사

△존스 홉킨스 , 뉴욕주립대 교수 역임, 전 미국 사회학회 부회장

△현 듀크대 아시아태평양연구소 소장

‘사회적 자본:사회구조와 행동에 관한 이론’(케임브리지 출판사,2001) 출간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