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극]'제방의 북소리', 연출-연기력 아우러진 감동의 무대

  • 입력 2001년 10월 16일 18시 29분


그들의 작품은 ‘태양’이라는 이름이 아깝지 않았다.

17일까지 서울 장충동 국립극장 야외 특설무대에서 공연되고 있는 프랑스 ‘태양극단’의 ‘제방의 북소리’.

이 작품의 줄거리는 간단하다. 600여년전 극동의 어딘가에서 발생한 홍수와 이를 둘러싼 인간 군상의 모습이 펼쳐진다.

“나는 무(無)를 보았소. 그것은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이 모두 끝난 후의 무였소.”

신관(神官)은 도입부에서 성의 주인에게 떨리는 목소리로 홍수를 경고하면서 작품 전체에 어두운 그늘을 드리운다. 하지만 벌목 사업으로 재앙을 자초한 성주의 조카 훈 등 지배 계급은 성을 부유하게 만들기 위해서는 필요한 일이었다고 강조한다.

이 작품에서의 제방은 물 줄기를 막는 수단이자 집단의 이해와 양심이 치열한 투쟁을 벌이는 상징적 코드. 성의 붕괴를 막으려는 훈 일파는 제방을 뚫어 물줄기를 수십만 농민에게 돌리려고 하고, 신관의 딸 두안과 성의 관리인 왕포는 이를 막으려고 한다.

이 뻔한 스토리에 힘을 불어넣은 것은 아리안느 므누슈킨의 연출력과 고도로 훈련된 연기자의 몸이 빚어내는 감동이었다.

이 작품은 일본 전통 인형극 분라쿠(文樂)의 형식을 따르고 있다.

분라쿠에서는 3명의 인형 조종자들이 진짜 인형을 다루는데 비해, 이 작품에서는 검은 의상을 입은 1, 2명의 인형 조종자들이 스타킹으로 얼굴을 감싼 ‘인형 역할의 실제 배우’들을 다룬다. 그래서 이 작품은 ‘배우가 연기하는 인형극’이라는 평가를 받기도 한다.

이 작품의 주제는 인형 배우와 조종자라는 두 존재에 의해 단적으로 드러난다. 자유의지와 관계없이 보이지 않는 힘에 좌우되는 인간의 허약한 운명을 보여주는 것. 두안과 왕포 등 정의의 편에 있는 이들도 홍수에 같이 휩쓸려 버린다.

마지막 대목에서 한 등장인물이 물 속에서 인형 배우를 상징하는 진짜 인형을 하나씩 건져내는 ‘화해 의식’을 진행하는 것이 의미심장하다.

이 연극은 분명 뿌리를 달리 하는 서양 연극인과 동양 예술의 전통이 만난 작품이다. 하지만 이 작품의 감동과 충격은 퓨전이니 접목이니 하는 상투적인 표현을 넘어서는 새로운 것이다. 태양이 강렬한 빛으로 다른 생명체를 낳는 것처럼.

사물놀이를 비롯, 동서양 악기를 사용한 장 자크 르메트르의 음악도 인상적이었다.

또하나. 극장 입구의 한 공간에서 배우들의 분장과 연습 과정을 지켜보는 것도 국내 공연에서는 맛보기 힘든 즐거움이었다.

<김갑식기자>gskim@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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