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백민석, '장원의 심부름꾼 소년'에서 조심스러운 변신

  • 입력 2001년 9월 10일 18시 22분


백민석의 소설이 지닌 금기적이면서 일탈적인 상상력은 늘상 독자들을 전율과 충격으로 몰아넣는다. 실재와 의미를 부정하는 극단적인 유희와 해체적 실험을 펼쳐온 그의 작품들은 소설장르의 변화양상을 가장 민감하게 포착해왔다.

그의 여러 작품들 중에서도 ‘16믿거나말거나박물지’(문학과지성사·1997년)와 ‘목화밭 엽기전’(문학동네·2000년)은 개인의 자율성을 휘발시키는 부조리한 현대 일상을 개성적 알레고리로 포착한 대표작이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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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과 폭력의 모티프를 화려하게 변주하면서 저항과 일탈의 상상력을 보여온 그의 소설들을 상상한다면 신작 소설집 ‘장원의 심부름꾼 소년’(문학동네)이 보여주는 고요한 침묵과 정제된 환상은 생경하게 느껴진다.

여덟편의 단편이 수록된 이 소설집에서 욕설과 조롱이 울려퍼지는 무허가판자촌이나 시끌벅적한 하드록까페, 핏자국과 신음소리로 덧칠된 펫숍의 이미지를 찾기는 힘들다. 대신 중세에나 존재할 법한 대저택과 시뮬레이션 게임 속의 정원, 명동과 충무로가 시대를 가로질러 여기저기 출몰한다.

작가는 독자의 상상적 개입을 적극적으로 유도하는 서사적 시공간을 설정한다. 그것은 일상현실과 환각의 세계를 자유롭게 넘나드는데서 발견된다. 환상의 형식이 극대화된 단편 ‘장원의 심부름꾼 소년’과 ‘이렇게 정원딸린 저택’은 서술자의 시점을 통해 현실과 환각, 과거와 현재를 오간다. ‘도련님 aw’과 ‘저택주인 wt’는 죽음과 삶, 이미지와 실재, 나와 타자의 경계를 혼란스럽게 하는 허깨비들이다. 이들은 허구라는 거대한 성 속에서 권력을 향유하면서 때로는 자아마저도 위협하는 환각으로 현현(顯現)한다. 작가는 ‘죽음’과 ‘기억’의 모티프를 통해 자아의 존재를 타자적인 것으로 분절하는 상상력에 몰두한다.

위의 두 작품을 제외한다면 다른 작품들은 일상탐구적 성격을 강하게 지닌 것으로 백민석 소설의 변화양상을 짐작케 한다. 죽음과 기억의 이미지들 역시 현재의 삶 속에서 반추된다. 특히 자전고백의 성격을 강하게 띤 단편 ‘이 친구를 보라’는 ‘헤이, 우리 소풍간다’(문학과지성사·1995년)와 ‘내가 사랑한 캔디’(김영사·1996년)의 성장담이 어디에서 움트는가를 노출한 기록이다.

샐러리맨들의 가슴 밑바닥에 자리잡은 우울한 환상의 공간을 ‘초원’의 이미지로 잡아낸 ‘검은 초원의 한켠’에서 보여지듯 청년기를 지난 삼십대의 일상인들이 꾸는 꿈은 허무하고도 음울한 색채로 물들여져 있다.

‘엽기’나 ‘폭력’의 코드를 탈피하여 새로운 상상력의 거점을 찾으려는 백민석의 시도는 조심스럽고도 유보적이다. 일상 속으로 잠입하려는 그 시도는 때로 작가 특유의 발랄하고 파괴적인 수사의 힘을 충분히 응집하지 못하는 것처럼 보인다. 분노와 저항, 조롱과 야유를 넘어서 대중적 소통의 출구를 찾는 것이 쉽지 않음을 작가 또한 의식하고 있는 것일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거대한 일상시스템 속에서 침묵하고 있는 존재들에게 상상력의 힘을 불어넣으려는 작가의 시도는 그 자체로 의미있다. 일상에 잠복한 일탈적 환상을 섬세하게 주조하는 것을 통해 체계와의 또다른 싸움을 시작하는 이 작가의 이어지는 작업을 기대한다.

백지연(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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