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인공적 상상력의 나래…우리 소설 변화 신호탄인가

  • 입력 2001년 8월 13일 18시 27분


문학 작품에 필수적인 여러 요소들 중 가장 중요한 것은 비유이다. 그리고 비유에 반드시 필요한 것은 ‘원관념’과 ‘보조관념’이다. 두 관념 사이의 거리가 얼마나 가까운가, 혹은 먼가에 따라 직유로, 은유로, 혹은 환유나 상징으로 이름을 달리한다.

어떤 작품의 난해함은 사실상 이 두 관념간의 거리가 지극히 멀어져서 발생한다. 예를 들어 ‘도로를 질주하는 13인의 무서워하는 아해’라는 보조관념과 ‘식민지 조선의 공포스러운 현실’이라는 원관념 사이의 거리가 너무 멀어서 이상(李箱)은 난해한 작가이다. 그러나 난해함이 거기서만 비롯되는 것은 아니다. 반대로 원관념과 보조관념의 거리 자체가 소멸될 때, 그리하여 보조관념이 원관념의 흔적을 완전히 지워버린 채, 독자적으로 떳떳하게 소설 속을 활보하고 다닐 때에도 난해함은 발생한다.

가령 조민희의 소설 ‘론리 하트’(‘론리 하트’·생각의나무)의 주인공에게 예의 그 목걸이는 아직 존재하지도 않는 카페 ‘론리 하트’로부터, 외로움의 보조관념으로서가 아니라, 아무런 설명 없이 ‘실제로’, 그리고 ‘실물로’ 배달되어 온다.

조씨만이 아니라 이평재의 소설들(‘마녀 물고기’·문학동네) 속에서 ‘마치’ 푸른고리문어와 섹스를 나누는 ‘듯한’ 강렬한 성체험은 비유로서가 아니라, 푸른고리문어와의 실제 섹스 행위로 나타난다(‘푸른고리문어와의 섹스’).

‘마치’와 ‘∼듯한’이 사라져 버린 보조관념들(그것들은 더 이상 보조관념들이 아니다)이 그녀의 소설 곳곳에 범람한다. ‘마녀 물고기’(‘마녀 물고기’), ‘벽속의 자궁’(‘마술에 걸린 방’), ‘거미인간’(‘거미인간 아난시’) 등은 모두 실재한다.

누차 작가는 이것들이 비유가 아니라 실재임을 강조하고 있다. 다소 다른 데가 있긴 하지만, 천운영의 근작들에서도 사정은 마찬가지이다. ‘월경’(‘세계의 문학’ 2001년 여름호)과 ‘눈보라콘’(‘창작과 비평’ 2001년 여름호)이 그 예이다. 이 소설들의 무대가 되는 공간은 주인공의 심리적 현실이란 원관념의 흔적을 거의 완전히 지워버린 채, 마치 정말로 존재하는 물리적 현실인양 실제의 지명까지 획득하고 있다.

요컨대 이 세 신예들의 소설 세계로부터 어떤 징후를 읽는 것이 가능하다는 말이다. 그것은 애초에 현실에 뿌리박고 있던 원관념으로부터 탈구된, 그리하여 가공된 보조관념들만으로 이루어진 완전한 인공 세계가 소설 속에서 가능할 것인가 하는 의문과 맞닿아 있다.

만약 이제 막 필력을 발휘하기 시작한 신예 작가들의 몇몇 작품만으로 어떤 징후를 예감하는 것이 섣부르지 않나 싶다면, 이들보다 고작 몇 년을 앞질러 있을 뿐인 다른 작가들을 떠올려 보는 것도 좋겠다. 김영하, 백민석, 박성원, 김연수, 정영문 같은 이들이 그들이다.

다만 이들은 이 세 신예들에 비해 현실과 체험(주로 90년대 초반의 정세와 관련이 있는)이 부과한 부채로부터 다소 덜 자유로왔을 뿐이다. 만약 양이 쌓여 질의 변화를 이룬다는 이전 시대의 명제가 아직도 유효하다면 우리 소설의 한 갈래는 지금 질적 변화의 초입에 들어서 있는 듯하다. 물론 그 질적 변화에 대한 가치판단은 또다른 숙제겠지만 말이다.

김형중(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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