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이달의 문학평]사랑,그 불온한 충동과 유쾌한 담론

  • 입력 2001년 6월 18일 18시 39분


대중문화의 수많은 아이콘 중에서 변함없이 사람들의 마음을 설레게 하는 것은 ‘사랑’의 기호이다.

문학과 영화, 드라마와 대중가요는 온갖 종류의 로맨스를 지치지도 않고 만들어낸다. 사회학자 울리히 벡은 현대사회에서 “사랑은 종교 이후의 종교이며, 모든 믿음의 종말 이후의 궁극적 믿음”이라고 명쾌하게 정의내린 바 있다.

현대사회의 신흥종교로 부상한 사랑의 담론은 문학의 영역에서도 다양한 형태를 만들고 있다. 최근 출간된 전경린, 유정룡, 이만교, 박현욱의 장편소설은 로맨스와 문학의 대중성이 맺는 관계를 가늠하게 하는 흥미로운 사례다.

스물 다섯 살 여성의 격정적 연애담을 그린 전경린의 ‘난 유리로 만든 배를 타고 낯선 바다를 떠도네’(생각의나무), 스와핑을 소재로 하여 결혼제도의 허위성을 성찰한 유정룡의 ‘사랑, 그네를 타다’(이룸)는 제도를 비켜서는 불온한 사랑의 충동을 집요하게 파헤친다. 전경린과 유정룡의 소설에 비한다면 이만교의 ‘머꼬네 집에 놀러올래’(문학동네)와 박현욱의 ‘동정없는 세상’(문학동네)은 한껏 가볍고 따뜻하고 유쾌한 사랑의 담론을 보여준다.

‘난 유리로…’와 ‘사랑,그네를 타다’는 개인의 욕망을 억압하는 결혼과 가족제도에 맞서 사랑의 자유를 내세운다. 모든 종류의 사랑은 고독한 자아를 달래는 마법의 묘약이며 저주받은 일상을 견디는 감미로운 환상이다. 인물들은 현실을 벗어난 순수한 격정에 자신의 몸을 던진다. 이러한 초월적 사랑의 코드가 성적 일탈의 코드와 부딪쳐 종종 불협화음을 만드는 것도 두 소설의 공통점이다.

이에 견준다면 ‘머꼬네 집에 놀러올래’와 ‘동정없는 세상’이 그리는 사랑은 투명하고 가볍기 그지 없다. 여기서 사랑, 결혼, 가족은 증오의 대상도 혹은 찬미의 대상도 아니다. 그것은 그저 유쾌한 이야기의 소재일 따름이다.

눈물나도록 우습고 따뜻한 농담들이 잠겨 있는 ‘머꼬네 집에 놀러올래’는 ‘한국가족 예찬론’을 펼치고 있는 것 같기도 하다. IMF 구제금융 시기의 한파와 거듭되는 불운에도 끄떡없는 가족애의 지고지순함은 건전한 홈드라마에서나 볼 수 있었던 내용과 겹쳐진다. 그렇다고 해서 유연하고 빼어난 이야기꾼의 솜씨를 뽐내는 이 소설의 의미를 단순한 보수적 가족 이데올로기로 한정짓기는 곤란하다. 소설 속의 사랑은 이미 현실상관성을 떠나 재미난 허구적 이야기의 세계로 훌쩍 진입한지 오래이기 때문이다.

‘동정없는 세상’에서도 여자친구와 섹스를 해보고 싶어 조바심하는 앳된 소년의 모습은 퍽 사랑스럽게 다가온다. 소설에서 성장의 사회적 코드는 의도적으로 거세되고 있다. 더불어 연인과 가족은 미움과 집착의 대상이 아니라 삶의 정다운 동반자로 이상화된다. 어머니가 ‘숙자씨’로, 삼촌이 ‘명호씨’로 유쾌하게 명명되는 가족의 패러다임 속에서 성과 사랑 역시 무거운 관념을 의식하지 않는 즐거운 유희가 된다.

가족의 덫으로부터 풀려나려는 초월적 로맨스와 가볍고 산뜻한 허구의 로맨스 사이에서 요동치는 사랑의 담론은 위험하고도 매혹적인 기호로 다가온다. 황량한 현실에서 사랑의 설교만큼 강력한 최면술로 대중을 순식간에 사로잡는 무기는 없다.

그러한 의미에서 사랑은 “사소한 순간에 풀려버리는 그물코”(전경린)처럼 다가오는 운명적 모험인 동시에 “교묘히 위장된 그 음모의 부비트랩들”(유정룡)이 도사린 위험한 전장이기도 한 것이다.

백지연(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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