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자가 본 말년의 운보]"힘겨운 투병생활속 88세 미수전"

  • 입력 2001년 1월 25일 18시 48분


운보 김기창(雲甫 金基昶) 선생께서 운명하셨다. 사모님(화가 박래현)을 먼저 보내신지 25년, 빨간 양말을 그대로 신고 영원히 잠드신 선생의 얼굴은 너무나 평화스러워 보였다.

운보 선생의 투병생활은 1996년 5월 후소회(이당 김은호 선생의 제자들을 중심으로 한 한국화 단체) 창립 60주년 기념식장에서 쓰러지면서 시작되었다. 처음 쓰러지기 전후 수년 동안 선생은 ‘아름다운’ 치매에 걸려 있었다.

북에 있는 동생들이 그리워서였을까? 선생은 “홍콩의 한국대사관에 내 여동생 가족 열네 명이 피신해 있어. 완이(아들)가 데리러 가야 해!”라고 말씀하시거나, 댁 근처 ‘빨간지붕’이라는 이름의 양식집에 도착하면 허리 양편에서 재빨리 뽑아든 권총으로 총쏘는 흉내를 내면서 “여기가 박정희 대통령 단골집이야!”라고 비밀스럽게(?) 말씀하시기도 했다.

그리고 안국동 솟을 대문집 아가씨가 선생을 짝사랑해 신문에 난 기사들을 스크랩하며 늙어버렸다는 이야기며….

우리는 선생의 이러한 치매현상을 ‘소설 쓰신다’고 표현했고 때론 그 소설이 너무 사실같아서 확인해야 할 경우도 있었다.

그러나 1999년 여름 다시 한번 쓰러지고 일어난 선생은 언제 그랬던가 싶을 정도로 맑은 정신을 되찾으셨다. 자신이 처해 있는 현실을 직시하게 된 선생은 하느님이 왜 나를 이렇게 만들었느냐고 슬퍼했고, 우리는 오히려 지난날 선생의 치매기운을 그리워하게 되었다.

▲ 관련기사▲
[운보의 작품세계]손 대면 새 경지
붓으로 말한 '한국의 운보'
운보 김기창 화백의 연표

그로부터 선생은 집과 삼성서울병원에서 이승과 저승의 문턱을 수없이 오르내리면서 힘겨운 병상생활을 해왔다. 그 속에서 2000년 여름 88세 미수전을 치렀고, 12월에는 북녘 동생과 해후하기까지 했다.

운보 선생은 그림만큼 삶의 변화 폭도 컸다. 부인인 우향 박래현(雨鄕 朴崍賢)선생이 돌아가신 해인 1976년 전후로 크게 나누어 볼 수 있다.

우향이 미국에 계신 7년을 포함한 76년 이전 선생은 사회적으로 외로우셨고 경제적으로도 넉넉치 못한 상태에서 자녀들을 돌보시면서 청교도적인 삶을 사셨다.

부인이 돌아가신 후 그린 청록산수와 바보산수는 대단한 부를 안겨주었고, 그 여유를 농아들과 흔쾌히 나누어 가지셨으며, 그림도 삶도 해탈한 자유인으로서 놀라운 변화를 몰고왔다. 그 당시의 에피소드들이 널리 퍼져나가 선생의 평생 모습처럼 알려지고 있는 것은 안타까운 일이다.

지난해 선생의 88세 미수전 준비를 옆에서 도우면서 그 방대한 작품량에 다시 한번 놀랐고, 장르별 대표작들이 너무 많아서 우리 제자들은 어느 부문의 어느 작품을 대표작으로 내세워야할지 고심하기도 했다.

선생의 작품세계는 실로 거대한 교향곡이다. 새로운 회화세계의 장을 여는 문자추상, 태고의 신비를 담은 서정추상, 한국적으로 그려낸 예수의 일대기, 입체표현, 걸레그림 등 어느 영역에도 구애됨 없이 자유자재로 넘나들며 징이 되고 장구가 되는가 하면 아쟁, 가야금, 거문고 소리를 내며 구비친다. 마지막으로 이 시대의 우수와 해학이 담긴 청록산수와 바보산수가 산천을 휘돌아 울려퍼지는 퉁수소리로 아득히 멀어져가면서 이 거대한 오케스트라의 막이 내린다.

미수전을 준비하며 갤러리 현대의 박명자 사장은 말했다. 운보가 없는 화단은 적막할거라고. 벌써 화단은 적막 속으로 빠져들고, 후배들은 붓을 놓고 망연자실해진다.

심경자(세종대 회화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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