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맞이 주부들 즐겁게 일하려면…]힘들지만 현실 인정을

  • 입력 2001년 1월 21일 16시 36분


◇명절이 싫어요

결혼 2년차인 주부 강영은씨(31·서울 동작구 사당동). 지난해 추석 때와 다가올 설을 생각하면 가슴이 막혀온다. 새벽 3시에 시댁에 도착해 자는 둥 마는 둥 눈을 붙인 뒤 5시에 일어나 윗동서와 시누이들 눈치보며 하루종일 전을 부치고 고기를 구워댔다. 잠시도 쉴 틈 없이 일을 하다 보니 이미 밤 12시.

“결혼해서 남편이 그렇게 얄미워 보인 적이 없었어요.”

여성전용 인터넷 사이트인 주부닷컴(www.zubu.com) 게시판에는 명절 전후만 되면 명절 스트레스 경험담이 격렬한 어조로 쏟아진다.

“처음엔 ‘어차피 해야 할 일 기분좋게 하고 오자’라고 다짐하며 시댁에 갔죠. 그런데 시어머니가 시누이들 올 때까지 친정가지 말고 기다리라는 거예요. 또 한번 상을 차린 것은 물론이고요. ‘저도 친정에서 부모님들이 기다리고 계세요’하고 되뇌며 몰래 숨어 한참 동안 울었어요.”

“시동생 3명이 아직 장가를 가지 않았어요. 차례상 음식 장만해야지, 도련님들 세끼 밥 차려 드려야지. 빨래, 청소하고 애들 수발까지…. 올해부터는 남편을 윽박질러 시댁에 안 내려갈 겁니다. 차라리 욕을 먹더라도 이제는 좀 편해지고 싶습니다. 명절이 정말 싫습니다.”

◇명절의 심리학

전문가들이 정의하는 명절증후군은 ‘과거 명절을 전후해 겪은 다양한 스트레스 경험으로 명절만 다가오면 자신도 모르게 과거 경험이 떠올라 다양한 스트레스 증상을 재경험하는 것’을 의미한다.

서울중앙병원 정신과 홍진표박사는 “주부들이 명절에 평소와는 다른 경험을 하게 되며 ‘다르다는 것’ 자체가 일차적인 스트레스의 원인”이라고 말한다.

장시간 차를 타고 고향길을 가는 것이 스트레스이고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이어지는 육체적 노동도 힘겹다. 시댁 식구에게 받는 정신적인 스트레스도 이에 못지 않다. 덕담뿐만 아니라 험담이 오가며 집안간 비교, 자식간 비교도 짜증이 난다. 명절이 지나도 남편과 심각한 불화를 겪거나 한동안 우울증에 시달리게 된다.

이것도 ‘화병’처럼 우리나라 여성들만이 겪는 풍토성 증후군일까?

신경정신과 전문의 양창순박사는 “미국에서도 추수감사절 등에 대가족이 모이는 동부에서는 여성들이 명절증후군에 시달린다는 보고가 있다”고 말한다.

명절증후군이 반드시 여성만의 문제도 아니다.

직장인 최모씨(34)는 가족끼리 모이면 꼭 분란이 일어나는 명절 때가 너무 싫다. 장남으로서 대우를 못 받는다고 불평하는 형님 내외, 자식들을 위해 희생했으니 노후를 보장하라는 부모님, 불평 불만 많은 동생들을 만나고 돌아오면 울화가 치민다.

전문가들은 명절증후군을 슬기롭게 이겨내려면 본인의 노력과 식구들의 적극적인 도움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홍박사는 “우선 명절은 여자에게 성차별적인 ‘의식’임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 오히려 마음 편하다”고 조언한다. 여성에게는 힘들고 피곤하지만 어쩔 수 없이 한번은 치러야하는 ‘가족 의식’임을 인정하라는 것.

양박사는 “일이 힘겹다면 혼자 할 생각을 하지말고 나눠 하라”고 조언한다. 동서나 시누이에게 지레 짐작으로 부탁조차 않다가 일과 스트레스를 떠맡지 않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때 푸념조보다는 ‘지난해 동서가 이러저러하게 도와주니까 참 좋더라’는 식으로 말을 꺼내는 것이 좋다.

가장 중요한 것은 남편의 역할이다. 명절 전에는 “당신 또 힘들겠구나. 도와줄 일 뭐 없을까”라고, 끝난 뒤에는 “당신 정말 고생 많았어”라고 따뜻한 말 한마디만 하면 명절증후군이 깨끗이 치유될 수도 있다. 처가에도 반드시 ‘성의’를 표시해야 하는 것은 물론이다.

<박윤철기자>yc97@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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