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신간]축복받은 집

  • 입력 2001년 1월 5일 19시 11분


◇축복받은 집/줌파 라히리 지음/이종인 옮김/296쪽 8000원/동아일보사

남자인지 여자인지 구분하기도 힘든 작가의 이름을 살짝 훑어본다. 흰 수염을 흩날리는 힌두 승려 또는 히말라야 등산안내인이 얼핏 연상된다. 그러나 책 표지를 들추면 윤곽이 뚜렷한 젊은 미인의 얼굴이 눈에 뜨인다.

2000년, 33세의 인도계 여성 작가 줌파 라히리의 ‘축복받은 집’(원제: 질병의 통역사·Interpreter of Maladies)이 밀레니엄의 소설 부문 첫 퓰리처상을 받았다. 미국 언론매체는 ‘이례적’이라는 수사를 내세우며 그를 소개하기 바빴다.

‘기존의 수상 작가가 대부분 50대이고 집필 경력도 15년 이상이지만 이 작가는 등단 5년도 안된 33세의 작가다, 미국인의 보편적 일상이나 사건을 파고든 작품이 아니라 이민자의 자기인식을 다루었다, 퓰리처상은 장편에 주는 상이라는 관념을 깨고 단편집으로 수상의 영예를 안았다’ 등등.

줌파 라히리. 런던에서 인도인 부부의 딸로 출생, 미국 보스턴 인근에서 성장했다. 친지 방문이나 여행을 위해 인도를 자주 찾았지만 그곳이 ‘주소지’였던 적은 없었다. 상을 받은 ‘축복받은 집’은 그가 처음 책으로 엮어낸 작품집이다.

표제작이면서 가장 찬사를 많이 받은 ‘질병의 통역사’에는 인도의 힌두교 유적지를 안내하는 관광 가이드가 주인공으로 등장한다. 통역사로서 국가들 사이의 선린우호를 주재하려던 젊은 시절 꿈을 접어둔 채, 부업으로 병원에서 원주민과 의사 사이의 진찰과정을 통역한다.

어느 날 인도계 미국인인 일가족의 안내를 맞게 된 그는 안주인에게 마음이 끌리고, 여자 역시 그에게서 친밀감을 느끼며 맏아들의 출생에 대한 비밀을 그에게 털어놓는다.

정체된 부부관계에 숨통막혀 하던 주인공은 두 사람의 친밀감을 생활 속의 작은 구원으로, 젊은 시절 잃어버린 꿈에 대한 대안으로 여긴다.

그렇지만 그것은 그가 입밖으로 드러내지조차 못하는 상상이자 백일몽일 뿐이다. 작품 말미에 그가 더 이상의 ‘진전된 관계’를 포기하는 것은, 여자 역시 자기와 다름없는 정체감과 죄책감의 병을 앓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기 때문이다.

이 작품이 드러내듯 작가가 능숙하게 다루는 심리적 코드는 ‘비밀’이다. 의도적으로 숨겼든, 말할 필요를 느끼지 않았든 ‘말해지지 않은 것’은 주인공들을 조바심에 떨게 하고 의외의 행동으로 몰고 가며 특히 가족관계를 왜곡시킨다.

미국 사회가 이민자에게 강요하는 사회적 압박은 작가의 관심 밖이다. 오히려 그는 부부갈등, 기혼자의 외도 등 개인적 심리 문제나 이민자의 문화적 부적응에 주목한다.

작가의 섬세한 문체는 소극적이고 내성적인 성격의 주인공들에 세밀화와 같은 치밀한 내면묘사의 옷을 입힌다. 부부만의 시간을 맞아 말할거리를 찾아내지 못하는 남편 (‘잠시 동안의 일’), 아빠의 불륜으로 상처입은 아이의 아픔에 전염돼 울부짖고 마는 여인 (‘섹시’) 등은 ‘그래 맞아’ 무릎을 칠 만큼 생생한 인간상으로 독자 옆에 성큼 내려선다.

“작가는 책 속에 예측하지 못한 생명을 불어넣는다… 그의 플롯은 정교한 수학적 증명을 연상시킬 만큼 질서정연하다.” (‘뉴욕 타임스’ 북리뷰)

<유윤종기자>gustav@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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