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홀로 빠져드는 '레이브 파티'를 아시나요?

  • 입력 2000년 9월 26일 18시 34분


#힐튼호텔, 밤 9시반

아기들이나 무는 고무젖꼭지를 입에 물고 있는 젊은이들이 간간히 눈에 띄었다.

“왜 젖꼭지를 물고 있어요?”

한 여성이 고무젖꼭지를 쑥 빼서 보여주며 말했다.

“사탕이에요.”

대규모 레이브파티가 열리는 서울 힐튼호텔 컨벤션센터를 찾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로비에서 요란한 염색머리에 흰색두건을 쓰거나 야광봉을 손가락에 낀 무리를 따라가면 됐다. 높은 천장에 달린 작은 사이키 조명 아래서 1000명은 족히 넘는 젊은이들이 열광적으로 춤을 춘다. 40여개의 스피커에서 뿜어내는 전자음은 귓청을 때린다.

‘스테이지’라고 할 만한 무대는 없었다. 굳이 구분하자면 바닥에 마루가 깔린 중앙 근처가 스테이지, 카펫이 깔린 곳이 플로어인 셈이지만 다들 아무데서나 몸을 흔들어댄다.

미국에서 유행한다는 ‘레이브 바지’ 가 눈에 띄었다. 힙합바지보다 2∼3배 통이 넓었다. 여성은 탱크탑에 헐렁한 바지 차림이 많았다.

#레이브의 5W1H

80년대 미국에서 시작된 테크노음악은 90년대 중반 이후 한국에 퍼졌지만 레이브파티는 이제 막 자리잡기 시작한 문화현상이다. 레이브파티 기획사는 98년 ‘식보이’가 선보인 이후 현재 7개 정도가 활동 중.

최초의 레이브파티는 지난해 3월 6일 서울 홍익대 앞의 테크노클럽 NBINB에서 열렸다. ‘식보이’가 주관한 이 레이브파티에는 800여명의 레이버가 참가했다. NBINB는 현재 힙합클럽으로 바뀌었다. ‘식보이’는 미국과 캐나다인이 사실상 ‘사장’. 한국인으로는 DJ 달파란이 지난해 4월 서울 압구정동 타임투록에서 레이브파티를 처음 열었다. 현재는 홍익대 앞 10개를 포함 압구정동 이태원동 등 서울 시내에 열댓곳이 있다. 국내 테크노 마니아는 1만명 정도. 국내에서 활동 중인 DJ는 40여명.

#밤11시, 맘대로 춤

피크타임(밤 11시∼새벽 2시)으로 접어들면서 레이저빔이 벽에 갖가지 모양을 빚어내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계속 들어왔다.

테크노춤의 별칭처럼 된 ‘도리도리춤’을 추는 사람은 찾아보기 힘들었다. 캐나다 교포인 정현민씨(25)는 “그런 춤은 TV에나 나오는 것”이라며 “전지현처럼 춤을 추면 나이트클럽에서는 눈길을 끌지 몰라도 여기서는 관심조차 없다”고 말했다.

주위를 둘러보니 하나같이 ‘내 맘대로’ 춤을 췄다. 껑충껑충 뛰기도 하고 연체동물처럼 흐느적거리기도 했다. 한가지 눈에 띄게 이상한 것은 모두 혼자 춤을 춘다는 점. 여럿이 모여 춤을 추는 나이트클럽과 달리 레이브파티에서는 일행이 있는 사람도 춤은 혼자 즐겼다.

어깨가 닿을 정도의 가까운 거리에서 한 20대 초반의 여자가 혼자 춤을 춘다. 15분쯤 옆에서 뚫어지게 쳐다봤지만 단 한번도 고개를 돌리지 않을 만큼 자신에게 몰입해 있었다.

#소외로 소외를 이긴다

최근 테크노심포지엄에서 ‘테크노문화’를 주제로 발표한 김재범 명지대교수는 “레이브파티는 인간관계가 점점 형식화되는 현대사회에서 소외감에 어필하는 하나의 문화 상품”이라고 주장했다. 사람이 적을 경우 서로의 존재를 의식하지만 사람이 많을수록 개인은 더욱 철저하게 혼자가 돼 자신에게 몰입할 수 있는 역설적인 공간이 레이브문화라는 것. ‘고팅’이나 ‘헌팅’을 통해 ‘만남의 장’을 제공했던 나이트클럽과 정반대로 레이브파티는 개인이 더욱 소외될 수 있는 공간이 되는 셈이다.

이메일 ID가 ‘mogua’라고만 소개한 20대 남성은 “사람들의 에너지를 느끼면서도 혼자일 수 있다는 점이 레이브파티의 매력”이라며 “춤을 추면서 평소 미뤄뒀던 일들을 떠올리고 생각을 정리할 수 있다”고 말했다.

#밤12시, '레이브 잭슨' 등장

갑자기 환호성과 함께 다들 DJ 부스가 있는 앞쪽으로 몰려간다. 방한한 DJ 존 디그위드였다. 한 레이버는 “디그위드는 세계 3대 ‘트랜스’ DJ 중 한명”이라며 “테크노 마니아에게 오늘 행사는 마이클 잭슨의 내한공연이나 다름없다”고 설명했다.

그것도 잠시. 사람들은 DJ에게 관심없다는 듯 다시 춤을 추기 시작했다. 조금전의 DJ가 튼 음악과 별 차이가 없어보이는데도 레이버들은 반복되는 기계음에서 그 차이를 용케 구분해내며 열광했다. 어느 순간, 시끄러운 소음처럼 느껴지던 전자음이 친숙해지면서 그 속으로 빨려들어가는 느낌이 들기 시작했다.

테크노 사운드의 중심에 자리잡은 타악기 소리는 마치 아프리카 미개부족의 북소리 같았다. 심장박동이 점차 빨라지고 머릿속에서 터질 듯한 기계음을 들으며 몽롱하면서도 묘한 기분속에 완전히 몸을 맡기고 싶은 충동을 일었다.

#평화+사랑+합일+존중의 이데올로기

레이브파티에서 DJ는 테크노음악을 통해 레이버들을 황홀과 엑스터시로 이끄는 영매(靈媒)다. 박근서 경운대교수는 “레이브파티는 최첨단 기술의 결정체인 디지털 사운드를 이용해 고대의 종교 의식과 같은 황홀과 엑스터시에 도달하기 위한 공간”이라며 “레이버들은 춤을 통해 절정에 도달하려 한다”고 말한다.

테크노 중에서도 세계적 인기 장르가 ‘트랜스’(‘주술’이라는 뜻)라는 것도 레이브파티와 테크노음악이 갖는 주술적인 성격을 말해준다. 이 때문에 박교수는 “테크노문화란 단순히 레이브 파티나 테크노 음악을 즐기는 것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디지털 시대에 불어닥친 원시적인 향수와 연관되는 모든 것”이라고 정의했다. 그는 또 “레이버들은 기계화 디지털화된 세계속에서 인간의 생명력을 확인하고자 레이브파티에서 몸부림친다”고 설명한다.

흔히 테크노 마니아들은 레이브파티의 정신으로 ‘P.L.U.R’을 꼽는다. P.L.U.R은 평화(Peace), 사랑(Love), 합일(Unity), 존중(Respect)의 약자. 레이브파티의 궁극적인 목적은 황홀경 자체가 아니라 스스로의 존재를 확인하고 인식함으로써 공동체와 함께 하나의 유기체로 다시 태어나기를 기대하는 것이라는 설명이다.

#새벽5시, 뚜벅뚜벅

새벽 3시 디그위드가 자리를 뜨자 레이버들도 하나 둘씩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파티가 문을 닫는 5시 무렵에는 400명 정도가 남았다. 어두운 파티장에서 빠져나온 레이버들은 새 아침을 맞을 에너지를 충분히 얻었다는 듯 밝아오는 새벽 문명 세계로 뚜벅뚜벅 걸어나갔다.

<강수진기자>sjkang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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