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어난 곳은 서울 중구 신당동이었는데 6·25 전쟁으로 피란갔다 전쟁이 끝난 53년 이 곳에 정착한 이후 지금까지 살고 있어요.”
반 백 년 가까운 세월을 신씨가 이 곳에 머물 수 있었던 이유는 뭘까. 신씨는 이에 대해 “성균관대 때문”이라고 쉽게 말한다.
우선 학교에서 가깝기 때문에 학생들에게 임대하면서 고정수입을 얻을 수 있었던 것이 가장 큰 이유였다. “우리 집은 주로 자취생을 받았어요. 많을 때는 대지 57평, 방 7칸 집에서 방 4개를 자취방으로 줄 정도였어요.” 그 때 자취생 중 서울에서 생활하는 사람들은 가끔 이 집을 찾아오기도 한다.
그렇다고 대학 옆이 반드시 좋은 것만은 아니었다. 80년대 학생운동이 한창이던 때는 경찰이 쏘아대는 최루탄 때문에 집 식구 전부가 동네 산으로 피란가는 일도 적지않았다. 그는 “한 번은 학생들이 던진 화염병이 집 앞에 떨어져 불이 난 일도 있었다”며 “나라 사랑하는 학생들의 마음은 이해하면서도 속상할 때가 많았다”고 회고한다.
그가 이 곳을 떠나지 못하는 또 다른 이유는 이 일대에 산골 못지 않은 숲과 꽃이 있기 때문이다. 특히 봄이면 성균관대 캠퍼스에서 풍기는 라일락이나 아카시아 꽃 냄새에 숨이 막힐 정도. 또 북악산 자락에 위치한 성균관대 캠퍼스를 거쳐 동네 약수터를 오르노라면 별도의 운동이 필요 없을 정도. 실제 나이보다 훨씬 젊어 보이는 비결이 여기에 있다고.
자녀들의 교육에도 이 곳 만한 여건을 갖춘 곳이 없었다. 지금은 장성한 아들(29)과 딸(26)은 중고생시절을 성균관대 운동장에서 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다. 자취생들에게 아이들 과외공부도 부탁할 수 있었다.
최근 들어선 학교에서 지역주민들을 위해 벌이는 컴퓨터 특강 등 각종 생활교양강좌나 무료 음악회 등의 문화행사도 늘고 있어 유익한 시간을 보낼 수 있다. 게다가 지하철4호선도 가깝고 인근에 대학로가 있어 문화생활을 즐기는데 그만이다. 그는 “주말이면 이 일대에 사는 20, 30대 젊은 사람들, 특히 신혼부부들이 주말 나들이 코스로 이런 곳을 즐겨 찾는다”고 전했다.
<황재성기자>jsonhng@donga.com